[시론]공론화 없는 국방개혁, 아니되옵니다 국방개혁

모든 과거사는 논쟁의 대상이다. 임진왜란 당시 선조 임금에 대한 평가도 마찬가지다. 한 번의 전란으로 가장 많은 백성이 희생된 임진왜란에서 선조의 역할은 무엇이었나? 최초로 국가 총력전을 수행한 군주였다는 긍정적 평가도 있다. 그러나 잘못된 전쟁지도로 백성을 위험에 빠뜨린 실패한 리더십이라는 부정적 평가도 많다. 천안함과 연평도 사건을 겪었고 국방개혁을 강력히 추진하고 있는 이명박 대통령에 대한 역사적 평가도 이처럼 둘로 나뉠 것이다.

육군 중심 합참, 작전 지휘능력 한계

임진왜란 당시 수군에 무모한 작전을 지시했다가 말을 듣지 않으니까 선조는 지금의 합참의장 격인 도원수 권율로 하여금 이순신을 조사하게 하고 결국 파직했다. 그리고 원균을 삼도수군통제사에 임명하여 재차 해상 작전을 지시하였는데, 막상 전투가 벌어지자 조선의 수군은 전멸했고 원균도 칼에 맞아 죽었다. 이런 사태를 겪고 선조 임금과 권율은 수군을 폐지하려 했다. 수군통제사로 복직한 이순신이 선조에게 “신에게는 아직 열두 척의 배가 있나이다. 죽을힘을 다해 막아 싸운다면 오히려 할 수 있는 일입니다(今臣戰船尙有十二 出死力拒戰 則猶可爲也)”라는 장계를 올렸다. 나라의 운명을 구한 이 장계는 현재 해군 2함대사령부 정문에 있는 비석에 새겨져 있다.

천안함 사건이 벌어지고 며칠 후 백령도 근방으로 중국 어선에 섞여 북한 경비정이 남하하기 시작했다. 합참의장은 해군에 실탄으로 격파할 것을 지시했다. 해군은 “중국어선 격파는 작전예규에 맞지 않는다”며 저항했다. 이에 합참의장은 재차 사격을 지시했으나, 때마침 이 사실을 안 김태영 국방장관이 황급히 “쏘지 말라”고 진화하여 사태는 진정됐다. 만일 그때 사격이 벌어졌다면 천안함 위기는 더 큰 파국으로 치달았을 것이다. 바다에서는 오직 해군만이 판단할 수 있는 일이 이처럼 부지기수다.

천안함 사건 당시 합참의 전문성 문제는 사태 판단력 미비와 그로 인한 지휘보고의 지체, 각 군 전력을 효과적으로 동원하는 초동조치의 미흡 등 여러 형태로 드러났다. 바다에 대해 전문성이 없는 육군 야전 출신들로 채워진 합참이 해군을 지휘한 ‘무면허 운전’이다. 여기에다가 천안함 당시 합참 지휘부의 ‘음주 운전’까지 더해졌다. 연평도 포격사건이 일어난 지 한 달 후인 12월의 연평도 사격훈련 당시 합참이 공군에 지시한 작전은 전문성 없는 작전지휘의 대표적 사례로 거론되고 있다. 여기에서는 그 끔찍한 내막을 밝히지 않겠다.

선조 임금과 권율의 독선이 여전히 바다와 공중작전에서 재연되고 있다. 바다와 공중의 작전을 육지에서와 같은 것으로 인식하는 조선시대 식 지상군 문화 때문이다. 개혁을 하려면 이것부터 해야 한다. 현대전쟁을 제대로 통찰할 수 있는 전문성 있는 작전지휘 능력을 갖추는 것이다. 한 해군 제독은 필자에게 “북한의 위협보다 더 두려운 것은 합참의 부적절한 간섭”이라고 말한다. 꼭 해·공군의 말만 옳다고 주장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 그러나 중차대한 국방개혁을 앞두고 해·공군의 발언에 더더욱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선조 임금과 같은 오류를 범할지 모르기 때문이다.

해·공군 전문성도 존중하며 개혁을

이상우 국방선진화추진위원장은 “서북해역방어사령부를 만들려던 국방개혁 과제도 자군 이기주의와 저항으로 무산됐다”고 언론 인터뷰에서 말했다. 군의 전문성을 존중하고 배려하면서 더 높은 차원의 긍정적 흐름을 만들어내는 데 실패한 국방개혁은 국방개혁이 아니다. 그걸 못하고 나서 군을 탓하는 건 정직하지도 못하고 비겁한 일이기도 하다. 지난 1990년 국군조직법 개정에서 실패한 교훈을 이 정부는 아직도 깨닫지 못하고 있다. 조선시대에도 “전하, 아니되옵니다”라며 간언하는 일은 다반사였다. 지금은 제대로 된 공론화 과정도 안 거쳤는데 반대하면 ‘항명’으로 다스리겠단다. 그러니 이순신 장군처럼 장계를 올릴 수도 없지 않은가?
TAG

Leave Comments


profile월간 군사전문지 <디펜스21+> 편집장, 한겨레 군사사이트 <디펜스21> 전문필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