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굴] 국방개혁 실패의 역사③ 김대중과 기본정책서 국방개혁

 


 

김대중의 포괄적 개혁안, 기본정책서

미군 반대로 구조개혁에 실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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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주국방 담론 폐기 발언


문민정부 시절 간간이 이어져 온 국방개혁에 대한 논의들은 1998년에 김대중 대통령이 집권하면서 다시 수면 위로 떠오르게 된다. 이 시기에 가장 먼저 국방개혁 논의를 촉발시킨 계기가 된 것은 다름 아닌 외환위기(IMF 위기)였다.

이것은 특히 중요한 의미가 있다. 과거 국방개혁의 의미가 주한미군의 급격한 철수에 대비하여 자주적 생존의 길을 모색하고자 하는자주국방론에 그 뿌리를 두고 있었다면, 이 시기는 미국이 극동에서 10만 명의 미군을 장기간 주둔시키기로 하여 주한미군이 당분간 급격히 변환될 가능성이 거의 없었다. 즉, 자주국방이 개혁의 명분이 되지 못했다.

1월 21일, 김대중 대통령 당선자는 인수위 업무보고 자리에서 "세계 각국은 집단안보체제를 구축하고 있으며 미국도 자주국방이 사실상 안 되는데 우리만 유독 자주국방이라는 말을 현실과 다르게 사용하고 있다"고 말했다. 당시 임복진 인수위원은 "자주국방이라는 말은 배타적이고 국수주의적으로 비춰질 수 있다"고 덧붙였다. 이에 대해 국방부 내부의 호응도 있었다. 당시 국방연구원(KIDA)에 재직하고 있던 권태영 박사는 "향후 국방의 지표는자주국방이 아니라선진정예국방으로 교체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국방에서 자주의 담론이 폐기되는 분위기에서 앞으로 국방개혁의 핵심은 국방 운영 전반에 만연된 거품과 군살을 제거하고 효율을 달성하자는 데로 모아졌다. 여기에 군부 일각에서 적극적인 호응이 있었던 것은 외환위기라는 국가 초유의 재정위기 상황에서 군이 먼저 개혁의 모범을 보임으로써 당면한 외부로부터의 개혁에 적극적으로 대응한다는 판단이 깔려 있었기 때문이다.

50년 만의 정권교체라고 말해지던 제15대 대통령직인수위원회의 외교․안보분과.

1997년에 국가 환란 사태를 겪으면서 경제를 망친 책임자가 명확했기 때문에 새로 칼자루를 쥔 정권은 개혁의 칼을 마음껏 휘두를 수 있었다. 개혁을 표방하고 집권한 김대중 대통령 당선자에 대해 국민은 개혁을 바라고 있거나 적어도 용인하는 분위기였다.

당시 국제통화기금(IMF)은 한국에 대한 구제금융의 대가로 기업의 구조조정을 비롯한 강도 높은 개혁을 주문했다. 신자유주의 세계화 세력이 한국 정부에 깊숙이 개입하면서 낭비와 비효율을 없애고 외국 투자가에게 개방적인 국가로 변화하라는 준엄한 요구를 들이댔다. 김대중 당선자 진영은 이에 적극 부응했다.

그 여파는 국방 분야에도 밀어닥쳤다. 국방 운영 전반에서거품군살을 빼고 작지만 강한 군으로 변모해야 한다는 공감대가 확산된 것이다. 당연히 과거 정권의 불요불급한 무기도입 사업을 재검토하고 군 구조조정과 같은 개혁이 예상되었다.

그런데 문제는 이상한 방향으로 풀리기 시작했다. 시발점은 1998년 1월 22일 윌리엄 코언 미 국방장관의 방한이었다.

그는 한국에 들어와 김대중 당선자를 만난 자리에서 "한반도의 특수상황을 감안해 국방 예산의 삭감은 신중히 고려해야 할 것"이라는 권고를 했다. 이에 김 당선자는 자신의 튼튼한 국방에 대한 안보관을 제시하며 한․미 간 협력을 당부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 영향으로 당초 1조 5천억 원을 삭감하기로 되어 있던 국방 예산은 6200억 원만 삭감하는 것으로 조정되었다. 세계화와 협력안보라는 국제주의가 한국 국방과 접목되는 과정을 보여준 단적인 예라 할 수 있었다. 경제에서 주권의 자율성을 IMF에게 상당부분 양보했듯이 국방에서도 동맹국의 요구에 적극 부응하면서 자주국방 담론 폐기 발언이 나온 것은 군사주권의 자율성도 보다 유연하게 해석할 수 있다는 맥락으로 해석되기에 충분했다. 세계화를 적극 수용한 김대중 당선자의 시장경제 철학이 국방에 접목됨으로써 국방이 외부 환경 변화에 유연하고 탄력적으로 운영되도록 그 기반을 마련하는 데 초점이 맞춰졌다.

당시 국방부는 김대중 정부가 획기적인 군 개혁에 착수할 것으로 예상하고 미리 준비하고 있었다. 제15대 대통령직인수위가 출범한 지 얼마 안 된 12월 하순, 국방부는 삼청동의 대통령직인수위를 실무적으로 뒷받침하는 국방부 자체 연구위원회를 가동했다. 강도 높은 개혁에 대비하기 위해서였다.

이 인수지원팀에서 국방투자사업을 검토하던 김수영 박사는 매일 밤을 새고 있었다. 한국국방연구원(KIDA)에서 파견된 그는 국방투자예산 대폭 삭감을 전제로 한 국방투자예산 운용 방향에 대해 보고서를 작성했다. 이 보고서의 요체는 당시 방위력개선사업으로 불리었던 국방투자사업을 그동안의 병렬식에서 우선순위에 따라 정렬되도록 장기적 기획안을 작성한 것이었다. 사업 조정의 우선순위와 접근 방법이 정해짐에 따라 향후 국방 예산이 감축되더라도 국방이 신속하게 적응할 수 있게 되었다. 1998년에 실효성이 없다고 판단된 해군의 공기부양정, 육군의 신형 박격포 등이 전력소요에서 삭제된 것도 바로 이런 접근법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그러나 기득권의 저항도 만만치 않았다. 김 박사가 국방투자예산 삭감 계획을 작성한다고 알려지자 국방부 획득 부서 직원들은 그를 뱀 쳐다보듯 했다. 보고서가 제출되고 반려되기를 몇 차례 반복하더니 결국 거꾸로 된 지시가 내려왔다. 어떻게든 투자사업비를 늘려 잡으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거꾸로 꿰맞추려고 하니 이번에는 정부의 예산 기조와 들어맞지 않았다. 결국 이 전문가는 연구위원회 전체회의에서 국방운영의 개념도 못 잡는다며 인신모욕에 가까운 질책을 듣고 업무를 마무리해야 했다.



용두사미의 군 구조 개편안


합참의 군구조발전연구부는 오랜 기간 군 구조 개편 및 병력 감축 문제를 검토해 왔다. 연구위원회에 합참이 제출한 아이디어는 군 병력을 5만 명 이상 감축하고 지휘 계통도 단순화한다는 것. 더 나아가 국방부와 합참의 상부구조 권한을 재배분하고 정보부대의 분산된 지휘권을 통합하며 각종 군의 지원 기능을 민간으로 아웃소싱한다는 등 다양한 개혁안이 도출되었다. 국군체육부대와 간호사관학교도 폐지한다는 획기적인 안도 채택되었다. 이렇게 모아 보니 개혁 과제가 80여 개를 넘어서는 그야말로 종합적인 개혁안이 탄생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그 시점에서 갑작스러운 병력 감축은 국가 실업 사태를 악화시킨다는 논리가 삼청동 인수위 내에서 확산되기 시작했다. 이 때문에 오히려 놀란 측은 합참의 군구조발전연구부였다. 이들은 선거 직후부터 군 병력 감축을 각오하고 있었다. 그간의 연구결과를 종합한 군 구조 개편안도 거의 완성 단계에 와 있었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인수위 측에서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이렇게 해서 모처럼 국방부가 자발적으로 준비한 군 개혁 방안은 인수위로부터 아무런 인정을 받지 못했고, 모처럼 연구한 보고서도 흐지부지 사장되고 말았다.

2월에 부임한 천용택 국방장관은 4월로 예정된 김대중 대통령의 국방부 방문시 보고할 국방개혁안을 성안하기 위해 절치부심하고 있었다. 천 장관은 대통령에게 국방개혁안을 보고하도록 정책실에 지시한 바 있었다. 이에 대한 준비 상황을 보고하기 위해 정책실장 김인종 중장, 정책국장 이광은 소장, 정책조정과장 한민구 대령이 장관실로 들어갔다. 이 자리에서 국방개혁에 대해 아무런 개념이 없었던 위 3인이 천 장관으로부터 "엄청 깨졌다"는 소리가 들렸다. 이 일이 있고 난 후 한민구 대령이 긴급히 국내정책과장인 윤우주 대령에게 도움을 청했다. 윤 대령은 인수위 시절 연구위원회를 이끌며 개혁 과제를 종합한 인물이다.

윤 대령은 이제껏 연구위원회에서 준비한 국방개혁안을 천 장관에게 보고했고, 이를 기초로 대통령에게 보고할 국방개혁안을 가까스로 만들었다. 그러나 벌써 이 무렵에는 국방개혁을 주도하는 윤 대령에 대해 획득국장 이원형 장군, 문두식 기무사 참모장 등 군내 새로운 호남 실세와 군 본부의 수구세력들이 응징을 벼르고 있었다. ‘국민의 정부는 처음부터 개혁의 주체 세력을 형성하지 않았다. 오히려 개혁에 헌신한 개혁파 장교들은 그 직후 험난한 핍박과 보복의 비극적인 운명에 접어들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인수위 시절 국방부 연구위원회에 참여한 장교들 중에서 1998년 연말에 진급자가 한 명도 나오지 않았다. 개혁을 외치던 장교들에 대한 명백한 정치보복이었다.

개혁에 대해 미온적 태도를 취하던 천 장관은 재임 기간 내내 야당이 아닌 여당으로부터 "장관이 과거 정부의 잘못된 국방을 개혁하고 개혁의 길로 나아가기를 주저한다"며 내내 정치공세에 시달렸다.

그러나 이러한 비난을 받았다 할지라도 국방부가 개혁을 마냥 외면했던 것은 아니다. 천 장관의 지시로 국방부에는 국방개혁위원회가 설치되어 국방개혁 과제들을 검토하기 시작했고, 국방부 정책실은 지금까지의 개혁 과제를 종합한 새로운 국방 관리 지침인 『국방기본정책서』를 만드는 데 심혈을 기울였다.



개혁의 매뉴얼 『기본정책서』


『국방기본정책서』는 김영삼 대통령 시절에 21세기 국방연구위원회가 성과를 내지 못하고 단명으로 끝난 이후 국방연구원(KIDA)에서 권태영 박사가 37명의 연구 인력을 동원하여 만든 「21세기 통일 대비 국방 발전 방향」의 모태가 되었다. 당시 이를 통제한 국방부 국내정책과장이 훗날 육군 인사참모부장을 역임한 윤일영 대령이다.

이를 바탕으로 각 군의 의견을 수렴하여 국방부 차원의 연구는 1996년 2월부터 11월까지 국내정책과장 신병호 대령의 주도하에 진행되었다. 당시에는 군 원로와 언론인 등 민간 전문가들의 의견까지 대거 수렴되었는데 민간 전문가로는 김경원․나웅배․현홍주․박영철․김진현․이상우 등이었고, 군 출신으로는 강영훈․이재전․서진태․이종오․권태영, 언론인으로는 김대중․김영희 2명이 참여했다. 최초로 민간 전문가들에게 국방개혁의 청사진이 공개된 셈이다. 이때 국내정책과장은 윤우주 대령이었다. 이들의 자문 내용을 연구에 보강한 3차 연구는 1997년 7월부터 9월까지 진행되었다. 그러나 1997년 말의 외환위기와 정권교체로 국방 예산을 재판단하고 중기 기간 중 중점 분야를 보완할 필요성에 따라 4차 연구가 1998년 1월부터 2월 사이에 진행되었다.

마지막으로 5차 연구는 정책화를 위한 의견수렴 단계였는데, 1998년 6월 26일에 차관 주재의 정책회의와 6월 29일에 장관 주재의 군무회의를 통해 기본정책서가 최종 확정되기에 이르렀다.

『국방기본정책서』는 이제껏 만들어진 모든 개혁 문서 중에서 가장 괄목할 만한 체계와 형식을 갖추고 있었다. 1998년에 총 6회의 군무회의를 거쳐 탄생한 『국방기본정책서』는 우리 군의 핵심 정책들을 우선순위를 판단하여 체계적으로 정렬하고 각 세부 정책별로 고유번호를 부여했다. 그리고 단계별로 이행 목표를 구체적으로 제시하여 각 군이 개혁의 매뉴얼로 활용하도록 했다. 적어도 국방 환경이 어떻게 변하든 간에 이 문서를 기본으로 하여 국방 재원 규모에 부합되도록 그때그때 속도만 조절하면 전체적인 국방개혁의 대의와 취지는 손상되지 않도록 한 정교한 장치였다.

그러나 이제껏 모든 정권에서 그랬듯이 이 작업은 계룡대로부터 아주 조직적이고 집요한 방해를 받았다. 군무회의에서 각 군 총장이 이 문서에 대해 토의를 하고 모두가 개혁에 승복하도록 설득해도 도무지 이에 동의하려 하지 않았다. 계룡대는 국방개혁이 각 군의 기득권을 훼손하고 국방부 본부의 영향력을 최대화하는 ‘대국방부 제도’로 나아가려는 것으로 의심했다. 개혁을 명분으로 내걸고 일을 하면 국방 차원의 통합성과 합동성을 증진하는 안을 제출하게 마련인데, 이렇게 되면 해․공군으로부터 "또다시 통합군을 만들려고 한다"고 반발을 사기에 충분했던 것이다.

유삼남 해군참모총장은 이에 대해 강력히 반대하다가 입장이 곤란해지면 총장들이 서명하게 되어 있는 ‘동의란’에 자신이 서명하기로 되어 있는 자리가 아닌 공군참모총장 란에 서명했다. 국내정책과장이 할 수 없이 해군본부에 다시 총장 서명을 받으러 갔지만 유 총장은 이번에는 서명하길 거부했다. 국방부에 대한 피해의식이 특히 강했던 해군은 이전과 같이 국방부 개혁안이 육군의 영향력 확대를 위한 수단으로 인식했다. 

한편 육군에서도 이상한 움직임이 나타났다. 애초 각 군 본부의 기능을 검토하려 했던 개혁안이 추진되던 무렵인 1998년 7월, 갑자기 국방부 개혁위원회에 육군 1군사령부와 3군사령부를 통합하는 안이 제출됐다. 이 구조개편안은 육군 교육사령부에서 연구해 온 것이다. 교육사령부의 군구조발전 연구안은 김관진 육군 전략기획처장이 국방부에 설치된 국방개혁위원회에 제출함으로써 비로소 공론화되었다. 육군본부의 기능이 손상되지 않고 단지 야전군 사령부만을 통합하여지상작전사령부를 창설하자는 개혁 방안이었다. 국방부는 한국군 상부구조를 개혁하려던 애초의 안에서 후퇴하여 이 안을 받아들였다.

한편 국방기본정책서가 만들어지고 있던 1998년 6월에 천용택 국방장관은 이와 별도로 생뚱맞게 ‘신국방정책’을 발표했다. 정권 초기에 군이 잦은 사고로 국민의 질타에 시달리는 상황에서 아무런 법적, 정책적 권위도 없는 국방정책을 발표하여 혼선을 유발하는 동시에, 정권에 ‘국방개혁의 원조’라는 포퓰리즘에 영합하는 조치였다. 이 작업은 당시 차영구 정책차장이 주도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미 존치되어 있던 국방개혁위원회와 별도의 정책을 수립한 것은 무언가 보여주는 식의 정치적 행위일 뿐, 국방개혁에 기여한 바를 찾아볼 길이 없다. 

이렇게 해서 각 군의 의견수렴을 마친 『국방기본정책서』가 김대중 대통령에게 보고된 때는 1999년 1월이었다. 장기국방 기본정책이라는 최고의 기밀사항을 대통령에게 보고하는 이 자리에는 극소수만 참석했는데, 청와대측에서는 임동원 외교안보수석이, 국방부 측에서는 천용택 장관과 김인종 정책보좌관, 이상희 정책국장이 참석했다. 이상희 정책국장은 당시로서는 파격적이라 할 수 있는 각종 도표와 그림으로 구성된비주얼한 30쪽짜리 보고서를 토대로 보고를 진행했다. 보고를 받은 김 대통령은 이 문서의 미래 예측과 문제의식, 그리고 체계적인 정책 구상에 감탄하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렇게 미래에 대한 보고서를 만든 부처는 새 정부 수립 후 국방부가 유일하다. 오늘을 제2의 국군의 날이라고 생각하고 이 문서에서 제시한 정책을 차질 없이 추진하도록 만전을 기하라."



주한미군의 이의제기에 개혁 좌절


국방개혁안이 대통령의 재가를 받음으로써 김대중 정부에서작지만 강한 군을 표방한 국방개혁이 비로소 권위를 부여받게 되었다. 또한 정부 부처 중에서 유일하게 국방부는 국방개혁위원회를 상시 기구로 운영하여 지속적으로 군 개혁을 추진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하게 되었다.

『국방기본정책서』는 한국이 장기적으로 선진국방을 완결하는 시점을 2030년으로 구상했다. 그리고 중기 기간 중 1차로 국방개혁을 완결하는 시점을 2015년으로 잡았다. 이렇게 해서 최초로 나온 국방개혁안이국방개혁 기본정책 ’99~’15로, 2015년까지 병력을 50만 명으로 감축하고 군 상부구조와 각종 하부 기능에 대한 구조조정을 완결 짓는 것으로 되어 있다.

50만으로의 감군을 위해서는 무엇보다 육군 병력과 부대를 감축해야 했다. 육군은 8개 군단에서 5개 군단으로 축소하고 사단은 50개 사단(상시 23개, 향토 13개, 동원 14개)을 대폭 감축하기로 했다. 이렇게 상비전력이 줄어드는 대신 동원전력을 상비전력의 보조전력에서 주전력으로 발전시킨다는 계획이다. 육군의 점진적 감축으로 병력 점유 비율은 육군은 81%에서 71%로 줄어들고 해군과 공군은 각기 14.6%와 14.4%를 유지하는 것으로 정해졌다.

이러한 전력 조정은 현존 전력은 조정 및 보완 차원에서 정비하여 점진적으로 줄여 나가되 미래 핵심전력 7개 분야인 ▲정보전력 체계 ▲전략무기 체계 ▲기동전 체계 ▲해상․해중 체계 ▲공격편대군 체계 ▲유도탄방어 체계 ▲포병 체계를 중점적으로 추진하기 위해 국방재원을 집중한다. 이렇게 해서 대북 억제에 있어 자주적 방위 역량을 강화하면서 미래전에 대비한 거부적 방위 역량을 확보한다는 것이 전력증강의 기본 방향이다.

나아가 2차 국방개혁의 목표 시점은 2020년으로 잡았다. 『국방기본정책서』는 이런 식으로 5년 단위의 계획을 모아 2030년까지 시기별로 달성해야 할 국방 목표를 정해 놓았다. 그렇다고 2030년이 끝이 아니다. 『국방기본정책서』는 별책 부록으로 통일 이후 단계의 군사력 운용에 대한 청사진을 첨부하여 갑작스럽게 통일이 될 경우에도 대비했다.

그런데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자주적 국방태세에 대해서는 별다른 언급이 없다. 다만 미래 국방이 현재의 남북 대치 상황을 넘어 평화공존기에 접어들고, 더 나아가 통일 단계까지 고려했을 때 한․미 군사동맹을 통일 전과 후로 구분했을 뿐이다. 작전권 전환 등 한미동맹의 지휘체계를 자주화하는 문제는 통일 이전에는 시행하지 않고 통일 이후에 추진하는 것으로 변경했다. 이전 정권이 주한미군의 급격한 감축에 대비해 자주국방을 서두른 것과는 사뭇 다른 분위기였다.



주한미군, 개혁안을 불신

 

2015년까지 국방개혁의 기조는 현존 위협과 미래 위협에 동시에 대비한다는 것이다. 이 무렵 국방부는 북한의 재래식 현존 위협은 계속 감소하는 반면 핵․미사일 같은 비대칭 위협과 주변국의 잠재적 위협 같은 미래 위협은 계속 증가할 것으로 내다봤다. 따라서 전력보강의 최우선 순위는 현존 위협과 미래 위협에 동시에 대비할 수 있는 전력이어야 했다.

예컨대 육군의 경우를 보면 재래식 보병 전력은 현존 위협 대비용이지 미래 위협에는 효용 가치가 적다. 따라서 육군은 기계화부대와 미래 포병부대를 주축으로 한 체제로 전환되어야 했다. 그러나 한국군의 기계화부대는 재래식 전차와 장갑차로 무장된, 말만 기계화부대이지 실질적인 전력은 턱없이 부족하다. 따라서 이 전력이 현대화되어야만 육군은 감축된 병력으로 미래를 준비할 수 있다고 보았다. 이를테면 기계화된 기동군단은 병력 수가 6만~7만 명이다. 보병 1개 군단이 12만~13만 명인 만큼 기계화로 전환하면 병력 수가 절반으로 줄어든다. 반면 현재 미국의 스트라이커 부대와 유사한 차기 전차와 장갑차 등 새로운 신형 전력을 보강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이처럼 육군의 전력을 기동전력 위주로 재편하게 되면 병력을 대폭 줄일 수 있다. 물론 보병부대는 감축한다.

해군과 공군 역시 제4세대급 무기라 할 수 있는 F-15급 전투기, 중대형 잠수함, 이지스급 구축함, 대형 수송함 등 억제전력 위주로 전력을 보강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이렇게 2015년까지 국방개혁을 완결하는 데 드는 재원은 모두 420조 원 정도로 산출했다. 

『국방기본정책서』에 따라 1999년에 군의 정보부대 지휘권이 정보본부로 통합되고 체제가 개편되었다. 또한 국군수송사령부가 창설되는 등 818 계획에 제시됐던 기능부대 창설은 여전히 계속되었다. 그러나 각 군 본부를 국방부가 흡수하고 합동성 위주로 군 체제를 개편하려는 시도는 드러나지 않았다. 당면한 문제는 육군의 군 구조 개편이었다.

그러나 이것마저도 미군이 이의를 제기하면서 얼마 못 가 폐기되었다. 군 구조 개편안이 미군과 협의하는 과정에서 브레이크가 걸린 이유는 미군의 지휘통제체계인 전구지휘통제시스템(GCCS : Global Command Control System)과 한국군의 지휘통제체계인 C4I가 충돌했기 때문이다. 미군은 한국군의 지휘통제시스템을 믿지 않았고, 두 군사령부를 통합해 지상작전사령부 하나로 작전지휘할 수 있다는 우리 국방부의 주장에 강한 불신을 나타냈다.

결국 이 문제로 국방부와 미군이 몇 차례 의견을 주고받은 끝에 천용택 장관의 후임인 조성태 장관은 "군 구조 개편은 우리 군의 정보화 달성 이후로 미룬다"며 다음 장관에게로 개혁을 미루었다. 그것으로 애초 계획한 군 구조 개편안은 유명무실해지기 시작했다. 그 다음 장관 누구도 우리 군의 지휘통제체계를 발전시키려 하지 않았던 것이다. 개혁의 핵심인 부대구조 개편이 그 추진동력을 상실하자 국방개혁은 자연스럽게 무너지기 시작했다. 폐지하기로 했던 국군체육부대와 간호사관학교도 슬그머니 되살아났다. 전력구조 개선도 답보상태를 겪으면서 굳이 개혁이라고 부를 만한 상황도 아닌 일상적인 전력개선으로 이어졌다.

그 결과 한국군은 여전히 신경과 혈관이 허약하여 구조조정조차 제대로 할 수 없는 상황에서 헤어 나오지 못했다. 마치 체력이 약한 환자가 수술을 받을 수 없는 것처럼 한국군에게는 수술조차 불가능하다는 진단이 미군으로부터 나왔다. 일단 기본이 되어 있고, 스스로 지휘할 수 있는 자신감이 있어야 군 구조를 과감히 바꿀 수 있는데 당시의 한국군에게는 그것조차 불가능했던 것이다. 이것으로 국민의 정부에서 군 개혁은 별다른 성과를 내지 못한 채 끝나고 말았다.


각 군의 이해관계로 개혁 실패


한국이 C4I와 같은 현대전에 필수적인 지휘통제 능력을 등한시한 이유는 무엇일까? 이유는 간단했다. 전차․자주포와 같이 유형 무기를 도입하면 부대가 창설되고 보직이 늘어난다. 그런데 지휘통제 능력을 발전시킨다고 투자를 늘리면 군의 효율은 높아지지만 자리가 늘어나는 것은 아니다. 육․해․공 각 군은 자신의 예산과 인력을 팽창시키는 데 관심이 있지 현대적인 면모로 군의 체질을 개혁하는 데는 도무지 관심이 없는 것 같았다. 

이와 같은 실태는 『국방기본정책서』가 제시하는 시대 상황에 군이 전반적으로 부응하지 못하는 심각한 결함을 드러냈다. 이런저런 이유로 개혁의 주체와 리더십이 형성되지 못했고, 현실에 안주하는 수구적 분위기로 말미암아 침체를 거듭했던 것이다.

그러나 한국군의 C4I가 비록 미흡하다고 해도 이것을 이유로 미군이 군 구조 개편에 반대했다는 점은 석연치 않다. 군은 기본적으로 원시적인 의사소통만 되어도 전쟁 자체는 수행할 수 있다. 무전기도 변변치 않았던 한국전쟁 때 어떻게 유엔군과 합동작전을 할 수 있었단 말인가? C4I를 내세워 조직적으로 미군이 한국군의 구조개편을 방해한 이면에는 다른 이유가 있었다.

윤우주 예비역 대령은 필자의 집요한 질문에 결국 사실을 털어놓았다. 그의 말이다.

“후에 주한미군 측 인사와 대화하면서 밝혀진 일이지만 미군은 한국군 지상군사령부가 창설되어 지상작전에 대한 한국군 장성의 일원적 통제 체제가 확립되면 향후 미 지상군이 한국군의 지휘를 받는 상황이 초래될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비록 한미연합사 부사령관인 한국군 장성이 연합사에 지상군구성군 사령관을 겸임하고 있다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연합사령관의 통제에 들어와 있는 상징적 위상밖에 갖고 있지 못하다. 그런데 이와 별도로 한국군 내에 지상작전사령관이 생겨나면 미군의 위상이 제한될지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그럴 바에야 현재와 같이 너절너절하게 분산되어 통합적인 지상작전 지휘를 하지 못하는 현 한국군 체제가 미군에 유리하다는 판단이 작용했다. 이것이 C4I를 명분으로 내세운 미군의 속셈임이 분명했다."

『국방기본정책서』는 한국 사회가 산업화를 넘어 민주화를 거친 새로운 정보화 시대에 진입했다고 진단했다. 정보화 시대에 걸맞은 개선된 군 구조와 효율적인 전력통합 운용 능력을 갖춘 군대로 한국군이 하루속히 전환되어야 했지만 군은 그러한 요구에 부응하지 못했다.

『국방기본정책서』가 있다고 하지만 국방의 큰 그림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각 군이 경쟁적으로 반영한 5년 단위 국방 재원 배분 계획인 국방 중기계획은 그 실효성이 보장되지 않았다. 여전히 실권이 없고 모호한 합참의 위상과 역할로는 각 군의 사업을 효과적으로 통제하기도 어렵고 목표지향적으로 군사력을 키우기도 어려웠다. 참모총장을 정점으로 한 무소불위의 인사권, 본인도 모르는 사이에 결정되는 진급 인사, 그리고 지휘 통일에 위배되는 이원적 군 지휘 체계는 국방부가 아무리 개혁을 추진하려 해도 발목을 잡으며 각 군의 관성대로 국방이 운영되도록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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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ofile월간 군사전문지 <디펜스21+> 편집장, 한겨레 군사사이트 <디펜스21> 전문필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