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은 절대 ‘읽어주지’ 말라

프로필.JPG » 앙큼군과 곰팅맘. 사진 권귀순 제공.

일찌감치 결혼했으나, 아이 없이 지낸지 13년. ‘룰루나 행성’에서 꽃을 키우며 지내던 앙큼군은 우주 폭풍을 만나 어느날 지구별로 떨어졌다. 아이가 없는 집을 둘러보다 우리집으로 왔다. (태명이 룰루인 앙큼군의 간략한 탄생 설화다.) 어딜 가나 엄마들한테 ‘언니’라는 호칭으로 통하는 ‘늙은 엄마’이지만, 앙큼군은 “엄마가 우리 엄마여서 다행이야”를 달고 사는 여섯 살 소년으로 자랐다. 한 해 전엔 “하느님은 어느 아파트에 살아요?” 묻더니, 올해는 “바다탐험대 옥토넛은 진짜 살아있어요?”라며 리얼리티를 궁금해 한다. 조만간 산타 할아버지가 어디로 어떻게 와서 머리맡에 선물을 두고 가는지 밤을 새워 관찰할 태세다.


곰과로 살아오던 곰팅맘은 새로운 종족 앙큼군을 만나면서 매일 새로운 일상을 산다. 앙큼군의 공작에 휘말리는 나날의 마무리는 책 읽기. 몸놀이가 버거워 무조건 눕히기 위한 수단으로 시작한 게 취침모드 책읽기다. 책을 읽다가 스르르 잠들어주면 가장 고맙다. 몇 권으로 이어지더라도 목만 조금 더 쓰면 되니, “책 읽어주는 게 가장 쉬웠어요”다. 소꼽놀이나 로봇놀이의 마수에 걸려들지 않기 위한 방패이기도 하다. 책을 보고 또 보고 백 만번 무한반복하는 서너살까지는 전집류 읽기, 대여섯 살이 되면서 도서관에서 단행본을 한두권씩 빌려 보여주고 있다. 곰팅맘은 현재 한겨레 책과 지성 섹션에서 어린이청소년 책을 소개하는 기사를 쓰고 있다.


[앙큼군과 곰팅맘의 책달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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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 운전하기 면허증

(글 핼리 듀랜드, 그림 토니 퍼실/민지현 옮김·그린북).


이 책은 재앙이 됐다. 매일밤, 아무렇게나 쌓아놓은 머리맡의 책더미를 훑는 서늘한 눈빛을 느낄 때면 나는 슬슬 도망간다. 

“엄마, 이닦고 올게.”

꽁무니를 빼보지만, 앙큼군은 때를 맞추는 센스가 있다.

“아, 찾았다. 엄마, 이 책 읽어주세요.” 역시나 그 책이다. 득의양양한 표정으로 이 책을 들고 있다.


그런 책은 ‘아빠한테 읽어달라고 해’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왔다가 들어간다. 책을 같이 읽는 사람은 녀석에게 ‘엄마’로 새겨져 있다. 아빠는 엉덩이 닦아주는 똥 당번, 잠자기전 물을 챙겨먹이는 물 당번…음, 그리곤 없나? 최근 하나 늘었다. 장기 당번. 이모 할머니 문병 갔다가 병원 휴게실에서 아빠랑 하게 된 장기 게임 이후, 아빠는 장기 두잔 소리에 시달린다.


책 당번이 엄마일지라도 절대 이 책만은 거들떠보지도 말라, 고 말하고 싶다. 책을 펴는 순간 후회막급이 밀려올 테니까. ‘아빠 목말’ 대신 ‘엄마 목말’을 즐겨타는 앙큼군에게 이 책은 곧 ‘엄마운전 면허증’이다. 엄마를 조종해보려는 앙큼군, 책을 펴기도 전에 눈빛이 반짝거린다. 


휴우, 첫장을 넘기며 시동을 걸어볼까? 부르르르릉~~~~

눈꺼풀은 풀렸지만 눈망울만은 또롱또롱한, 앙큼군과 비슷하게 생긴 미첼이 무언가를 들이밀고 있다. 세상에서 가장 무시무시한 위력의 ‘아빠 운전하기 면허증’!  

20151112_2s.jpg » 그림책 <아빠 운전하기 면허증>. 사진 권귀순 제공.

잠자리에 들 시간이지만 언제나 바로 잠자러 가지 않는다. 지구 이편이나 저편이나 잠자리에서 순순히 눈을 감으려는 아이는 없나 보다. 다섯 살이 되어 드디어 면허증을 딴 미첼은 잠자기 전 한 바퀴 드라이브를 해야 한다. 아빠 자동차 대령이오.

안전점검은 필수.  

먼저 새로 생긴 자동차의 타이어 상태를 확인한다. 아빠가 신은 고무 재질 슬리퍼를 툭툭 쳐보고 눌러보고는 “튼튼하네요” 하는 미첼.  

“꺄르르르르” 

“아아앗” 

깔깔거리던 앙큼군이 어느새 엄마의 발을 툭 치더니 꾹꾹 누르고 있다. “타이어 튼튼하네.”  


다음은 배꼽 엔진 점검. 그림을 보고 있던 앙큼군은 엄마가 글자를 읽기도 전에 내 배꼽을 향하고 있다. “여기도 좋아요.” 

‘우하하하’ 앙큼군의 웃음소리 데시빌이 높아가는 만큼, 엄마 자동차의 배터리는 방전돼 간다.  

드디어 운전석에 올라탄 미첼을 따라 앙큼군도 올라탄다. 운전석은 다름 아닌 목말 타는 어깨. 앞 유리창이 흐리다며 아빠의 안경을 빼들고 아빠 셔츠에 쓱싹쓱싹대는 미첼을 따라 안경도 안낀 엄마 눈 언저리를 비벼댄다. 미첼은 반짝거리는 앞유리창을 다시 끼우고 시동을 건다. 걸자마자 쌩 달리는 자동차. 자동으로 움직이는 기어 장치가 있는, 성능이 매우 좋은 자동차다. 


미첼의 핸들은 아빠 귀, 앙큼군의 핸들은 엄마 귀. 입에선 부릉부릉 배기가스를 태우는 소리가 난다. 가속이 붙어 그만 미첼의 자동차가 벽에 쿵 부딪혔다.  

“이크, 너무 빨리 달렸나 봐요.” 

말하려는 순간, 내 귓볼이 어디론가 확 당겨져 고개가 제껴진다. 미첼의 ‘귀당김 후진’과 동시에 앙큼군의 행동도 개시된 것. 귀가 얼얼하다.  

미첼은 자동차 앞에 장애물이 나오면 경적을 울리는 방법도 배웠다. 바로 코 경적. ‘빵빠아앙’ 비명인지 경적인지, 소리가 유난히 크다. 앙큼군도 깨알같이 따라한다. 가뜩이나 납작한 코가 으스러질 것만 같다. ‘앙큼아, 수술비 대줄래?’


20151112_3s.jpg » 그림책 <아빠 운전하기 면허증>. 사진 권귀순 제공.

깜빡이도 안켜고 오른쪽, 왼쪽 돌던 미첼은 ‘다른 자동차’가 걸어오자 충돌을 피하려 브레이크를 밟는다. 머리카락을 한움큼 뒤로 당기면 끼이익 하고 선다. 가뜩이나 엄마 머리카락을 갖고 놀길 좋아하는 앙큼군에게는 더없이 익숙한 브레이크다. “아아아, 제발 살려줘잉.”


미첼은 지쳐 떨어진 자동차의 주유 뚜껑을 열고 기름을 꿀럭꿀럭 넣는다. 입 뚜껑은 이렇게 닫는 거지. ‘합!’ 앙큼군은 이빨이 딱딱 부딪히는 소리에 또 꺄르르 넘어간다. 도로에 블록으로 쌓은 성이나 조립 기차선로 같은 ‘과속 방지턱’이 나오면 천천히, 탁 트인 큰 길이 나오면 전속력으로 달린다. 침대까지 가는 드라이빙을 계속 할 수 있는 한 미첼에게 잠자는 시간은 가장 기다려지는 시간이다. 이 책은 잠자는 시간을 가장 좋아하는 아이로 만드는 마력이 있다. 단, 엄마나 아빠 한 몸만 희생하면 말이다.


이 책 읽어주기, 아니 태워주기가 끝날 무렵이면 기진맥진 쓰러진다. 앙큼이는 그런 엄마를 통쾌해하며 재밌어 죽는다. 보통 때는 ‘또, 또’ 하며 다른 책을 엄마 얼굴에다 들이밀곤 하지만, 이 책의 장점은 한방에 끝난다는 거다. 

“꿈나라에서 보자. 엄마가 먼저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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