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나 악역, 늑대에게 부탁해 생생육아

 느지막이 낮잠에서 깬 늦은 오후였다. 쌀쌀한 데다 비까지 몇 방울 흩뿌린 탓에 외출할 마음이 안 든 무기력한 하루였다. 그럭저럭 해가 떨어지고 하루가 끝이 나기를 기다리는데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소리가 일요일의 정적을 깨트렸다.

 밖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흥미를 보이는 아이를 안고 할머니가 베란다 문을 열었다. 마을을 도는 트럭 위쪽에 달린 스피커에서는 못 쓰는 컴퓨터, 냉장고, 가전제품을 헐한 값에 산다는 녹음방송이 되풀이됐다.

 “뭐지? 뭐지?” 하며 신이 난 아이를 보던 할머니는 문득 옳다구나! 싶었던 모양이다. 전광석화처럼 머리를 스쳐간 생각이 입으로 쏟아진다.

 “밥 안 먹는 아기 데려간다는데 얼른 밥 먹자, 얼른 먹자.”

 서둘러 할머니가 밥 몇 술 떠 장조림 국물에 쓱쓱 비볐다. 스스로의 연기에 심취한 할머니는 연신 창밖을 향해 우린 밥 먹어요, 지금 먹어요. 그냥 가세요.” 외치기까지. 할머니의 목소리에는 긴박함이 베어났다.

 그때껏 아이는 두유 한 팩 마시고 찰보리빵 하나를 먹었을 뿐, 밥은 입에도 대지 않은 터였다. 하루뿐이 아니라 늘 반복되는 흔한 일상이라 밥 먹이기를 절반은 포기 나머지 절반의 또 절반은 체념, 그런 마음이 가득했다.  

 할머니가 부산스러워지자 덩달아 뭐 큰일이 났나 싶은지 아이도 의자에 냉큼 오른다. 두 숟가락을 억지로 받아먹더니 엄마랑, 엄마랑 먹어.” 절박한 눈을 하기에 선수교체.

 할머니는 뜬금없이 전화를 부여잡고 , 먹고 있다니까요, 그냥 가세요.” 하며 긴장을 늦추지 않고 엄마도 분위기에 편승, 서둘러 숟가락을 입에 디민다.  

 하지만 거기까지가 한계. 더는 먹지 못하겠다며 의자에서 내려오는 아이의 표정이 결연하다.

 아저씨 따라갈래.”

 이것은, 결코 예상치 못한 시나리오였거늘. 여기서 그래, 그만먹자.’ 마무리 지으면 시작하지 아니한만 못하게 되고.

 이 연극을 이어나가기 위해 내복 위에 겉옷 하나만 주섬주섬 입힌다. 목도리도 하란다. 평소 애용하는 목도리도 목에 둘렀다. 작은 손을 꼭 잡고 현관까지 갔다. 맨발에 신발도 신긴다.

 “그럼 아저씨하고 잘 가.”

 엄마와 작별할 때가 돼서야 아차 싶은지 엄마도 같이 가, 엄마도.” 아이는 목을 놓아 울고.

 “엄마는 못 가지. 밥 안 먹는 아이만 데리고 가는데 엄마는 밥 먹는 어른이잖아.”

 아, 어찌하여 나는 이 연극을 하고 있는가. 밖에서는 여전히 중고 가전을 매입하겠다는 방송이 들려오고.

 “밥 먹을래, 밥 먹을래.”

 끝까지 아저씨를 따라가겠다고 하면 어디까지 각본을 짜야하는가 고민을 했거늘, 이제 연극은 다시 순조롭게 진행되겠군 마음을 놓으며 다시 의자에 앉혔으나.

 아저씨를 따라가지 않으려 발버둥치며 씹지도 않고 밥을 꿀꺽 삼키던 아이는 결국 밥과 함께 두유까지 죄 토하고 말았으니.

 아, 야매 연극은 밑도 끝도 없이 막을 내리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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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밥 잘 먹는 아이들에게 가정교육을 참 잘 받았다고, 엄마가 애 교육을 반듯하게 잘도 시켰다고 칭찬하는 사람을 볼 때마다 아, 나란 엄마는 무엇인가 오그라들기만 한다.

 네 살 된 아기에게 아직도 밥을 떠먹여주고 있다면 당신은 이미 패배자! 육아 전문가의 엄마 실격 딱지에 에미 마음은 타들어가기만 하고.

 밥 좀 먹여보겠다고 협상을 하고 협박을 하고 회유를 하고 연극을 하고 내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치사하고 비굴해서 굶기고 말지, 하다가도 하루를 못 넘기고 마니 아, 밥이 뭐라고. 밥이 뭐라고.

 

 방송하는 아저씨 말고 늑대를 더 써먹을 걸 그랬나? 싶기도 하다. 양치를 너무도 싫어하는 아이에게 얼마 전 늑대가 등장하는 원시적 괴담을 좀 늘어놨다.

 “저어기 산 너머에 늑대가 사는데 좀 있음 출발할 거야. 밥 먹고 양치 안 한 아이는 잡아간대. 늑대는 양치 안 한 아기 이를 엄청나게 좋아한다네.”

 요즘 애들은 이해가 빠르다, 영악하다, 우리 때랑 다르다는 말을 수시로 듣고 몸소 느끼는 이때, 대체 이런 이야기가 먹혀들까 별 기대도 없이 뱉은 말이거늘. 아기가 양치를 하겠다며 엄마 허벅지에 척 눕는다.

 칫솔을 입에 넣기만 하면 입을 앙 다물고 절대 벌려주지 않으며 버티다 버티다 결국 폴리 칫솔 목을 끊어먹던 아기였거늘.

엄마는 아이 마음이 변할 새라 위아래, 위아래, 위위아래, 치카치카 칫솔을 움직이며 수시로 창 쪽을 본다.

 “우린 하고 있어, 우린 양치하고 있어. 오지 마.”

 현란한 손목 회전과 함께 분위기도 무르익고. 마침내 양치가 끝나면 아이 손을 잡고 창 쪽으로 가 소리친다.

 “우린 다 했다, 우린 다 했다. 딴 데 가, 잘 가, 오지 마.”

 아이의 얼굴에 만족스런 미소가 떠오르고 엄마는 늑대효과에 감사를 한다만.

 

 아아, 겁을 줘 가며 원하는 행동을 유도하는 이 어른 엄마는 너무 치사하지 않은가. 허나 뻣뻣한 아이를 말랑말랑하게 만들어주는 효과 만땅 늑대의 거짓말을 그만둘 수도 없고. 오죽하면 쓸데없이 애한테 겁을 준다며 늑대 이야기 그만하라던 할머니마저 트럭 아저씨를 끌어들이지 않았던가.

 허나 호사다마라.

 양치를 잘 하게 된 아이에게는 밤에 불을 켜고 잠드는 새로운 습관이 생겨났다. 깜깜한 어둠을 겁내지 않던 아이는 이제 밤의 어둠과 늑대의 두려움을 알아 버렸다.

 허나 조금만 지나면 곧 밤의 달달함과 신비를 깨닫게 되겠지.

 미안하다, 아들아. 그때까지 엄마가 늑대 이야기 좀더 우려먹자.

 이게 다 너의 하얗고 튼튼한 치아 건강을 위한 일이니, 마음 넉넉히 이해를 하거라.

 대신 엄마는 환한 조명등 아래에서  타들어가는 피부와 늘어만가는 주름을 기꺼이 감당하마.  

 

  언제나 악역 담당의 늑대에게 몇 달 더 부탁해 볼밖에. 부디 약빨이 오래 가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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