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살 아이의 말 배우기, 반갑고도 속상한 이유 생생육아

한동안 '아빠' '엄마' '다했다' '안낸내'(안 해) 정도의 말만 하던 케이티가 만 두 살 생일을 전후로 갑자기 말이 늘었다. 우리는 이중언어 환경에 살다 보니 집에 있는 아이 책이 모두 영어 책이고, 보게 되는 영상물도 영어 프로그램이 대부분이다. 한국인과 거의 교류를 하지 않는 엄마 아빠의 성향 탓에 손님이 오든 밖에 나가든 누굴 만나면 영어를 쓴다. 물론 집에 우리 세 식구만 있을 때는 100퍼센트 한국어를 쓴다. 이런 경우, 두 언어를 듣고 이해하는 능력은 빨리 키워지지만 두 언어를 사용해 직접 표현하는 건 약간 늦는다고들 한다. (물론 아이마다 개인차가 있기 때문에 모두 그런 건 아니다. 이웃에 사는 중국계 인도네시아인 친구는 딸 둘을 삼중 언어 환경(영어/인도네시아어/중국어)에서 키웠는데, 두 딸 모두 말이 빨리 트였다고 했다.)


그래서인지 뭔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케이티는 말이 빠른 아이가 아니다. 그러던 아이가 두 살 생일을 며칠 앞두고 하루가 다르게 할 줄 아는 말이 늘었다. 이 갑작스런 변화가 마냥 신기했던 어느 날, 남편과 식탁에 마주앉아 케이티가 어떤 말들을 하고 있나 적어보았다. 그랬더니 놀랍게도 단어 수가 50개가 넘어갔다. 대부분 아이가 좋아하는 사물이나 음식의 이름, 그와 관련된 소리들이었다. 케이티는 신체 활동과 노래를 좋아하는데, 그래서인지 움직임이 있는 사물이나 자주 듣는 노래 속에 나오는 말을 가장 빨리 배운다. 오 노!(Oh no!) 같은 건 또 어디서 듣고 배웠는지 적절한 때에 정확한 어조로 "오 노!"를 외치면 우리 부부는 배꼽을 잡고, 외출하는 아빠에게 "안넝!" 하고 손을 흔들면 절로 함박웃음이 지어진다.


드디어 최초 50단어를 넘어섰구나! 반가웠다. 이 처음 50개를 넘어서면 점점 더 많은 말을 배우게 되어 어떤 시기에는 하루 평균 8개의 새 말을 익힌다는데, 드디어 케이티에게도 언어폭발 시기가 오려는 모양이다. 이중언어 환경인데다 신체활동을 워낙 좋아하는 아이여서 말이 빨리 늘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래서 특별히 아이에게 말을 가르쳐보려고 한 적도 없고 그냥 때 되면 하겠거니, 했다. 그런데 드디어 때가 되어 말이 트이기 시작하니 신이 나서 자꾸 아이에게 말을 더 많이 걸게 된다. 새 단어를 천천히 여러 번 말해 주면 가만히 집중해서 내 입을 들여다보는 그 눈하며, 고개와 턱, 입술에 힘을 주어 한 글자씩 내뱉는 그 입이 어찌나 예쁜지! 어쩌다 새로 알려준 말을 한 번만에 익히기라도 하는 날엔 퇴근한 남편을 아이 앞에 데려다 놓고 '오늘의 단어' 시간을 갖기도 한다.


사실 우리는 아이가 하루라도 빨리 말을 하게 되기를 간절하게 바라고 있었다. 작년 이맘때 케이티는 발이 아파 걷지 못하는 날들이 많았는데, 어디가 어떻게 불편한지 정확히 모르는 상태에서 아이의 우는 얼굴을 보고 있자니 너무 속이 상했다. 밤마다 발을 붙들고 뒤척이느라 잠을 설치는 아이에게 나는 해 줄 수 있는 게 별로 없었다. 아이는 땀이 나면 유독 KT 증상이 있는 오른발에만 땀이 많이 나고, 그 발을 만지며 가려운지 따가운지 아픈지 모를 어떤 불편함을 호소했다. 대체 저 느낌이 뭘까. 가려운거면 긁어주고, 따갑거나 아프면 진통제라도 주지. 뭔지도 모르는데 내가 어떻게 해 줘야 하나. 진통제는 가능하면 안 먹이고 싶은데 병원에선 잠을 못 잘 정도로 불편해하면 그거라도 먹여보란 말뿐이었고, 아이는 밤중에 자다 깨면 약을 안 먹겠다고 버티며 울었다. 그 시간들을 버텨내던 어느 날 밤, 나는 저 불편한 느낌의 정체를 알기 위해 미국 KT 서포트 그룹 사람들을 붙들고 물었다. 한 엄마가 덧글을 달았다. "여덟 살짜리 우리 애도 가끔 KT쪽 다리가 아파서 잠을 못 자는데, 애 말로는 그게 '거미가 다리 안쪽에서 살을 잡아당겨 무는 느낌'이래요." 발이 여덟 개인 거미가 잡아당기는 느낌이라니. 말로 표현을 할 수 있다면, 저렇게 할 수 있구나! 그래서 더더욱 기다렸다. 말이 트이기를.


아니나 다를까, 최초 50 단어와 함께 케이티는 신체 각 부분을 정확히 말로 표현하고 짚어내기 시작했다. 눈에 이물질이 들어가면 내게 와서 "눈, 눈"하며 눈을 들이대고, 귀가 간지러우면 귀에 내 손가락을 갖다 넣고 "귀" 한다. 며칠 전엔 갑자기 욕실 어딘가에서 라벤더 향이 나는 비누를 꺼내 와서는 오른발에 대고 문지르며 "비누, 발, 발" 했다. 무슨 소린가 하고 가만히 보니 놀랍게도 아이는 작년 이맘 때 내가 라벤더 오일+코코넛 오일로 림프액 배액 마사지를 해 준 걸 기억하고 있는 거였다. 통증이 있을 때 진통제는 최후의 보루로 남겨놓고 그 전에 할 수 있는 모든 걸 해보자는 심정이었던지라, 작년 겨울에 이것저것 시도해 본 것 중 하나가 이센셜 오일을 활용한 마사지였다. 신경 안정작용을 한다는 라벤더 오일을 코코넛 오일에 섞어 림프액 배액 마사지 마무리 단계에 발라주곤 했다.


갓 한 살 생일을 넘긴 때에 엄마가 해준 마사지, 그 향과 느낌, 그 이유를 기억하는 케이티를 보고 우리 부부는 "똑똑하다!"며 호들갑을 떨기도 하지만, 사실 마냥 반가운 것만은 아니다. 아프고 속상할 때도 있다. 왜 아니겠는가. 말을 배우면서 가장 먼저 익히게 되는 것이 아프고 불편하다는 표현이라면. 얼마전 MRI를 찍느라 수면마취를 했는데, 손등에 남은 주사바늘 자국과 멍을 보고 궁금해 하기에 "응, 주사 바늘 때문에 피가 났어. 지금은 피는 멈췄지만 멍이 들었어." 하고 말해줬다. 그랬더니 단번에 '피'와 '멍'이라는 단어를 익히고는 바지를 걷어 올려 무릎 위에 난 물집을 가리키며 '피' 한다. 그래, 거긴 항상 딱지가 앉아 있고, 잘못해서 긁히면 피가 나지. KT. 모세혈관. 포트와인스테인. 림프액..그래 맞아. 맞는데, 엄마는 왜 이리 속상하니.


속상할 땐 속이 상하더라도, 이런 건 어쩔 수 없다. 평생 갖고 살아야 하는 병이니 잘 알고 있는 게 좋겠지. 피가 나더라도 너무 놀라지 않고 침착하게 대처하도록, 도움이 필요할 때 정확하고 자세히 설명해 적절한 도움을 신속하게 받을 수 있도록. 이렇게 생각하면 아이가 KT에 관련된 말을 배워나가는 건 긍정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 최근 우리는 케이티가 감정표현에도 익숙해지도록 돕고 있는데, 그것도 다 KT 때문이다. 화가 날 땐 화가 난다고 말로 몸으로 표현해야 마음이 덜 다친다는 것을, 좋고 고맙고 미안한 것도 다 말로 몸으로 표현할 줄 알아야 한다는 것을, 눈물이 날 정도로 아플 때는 약의 힘을 빌릴 수도 있다는 것을 일찍부터 알려주고 싶어서다.


하지만 케이티에게 일찍 가르치고 싶지 않은 말도 있다. 욕설과 남을 비하하는 표현이 바로 그것이다. 장애가 있는 아이를 기르는 부모들이 종종 하는 이야기가 있다. 아이들이 말을 처음 배울 때 욕설과 각종 비속어도 열심히 가르쳐야 했다는 이야기. 집 밖에 나서면 나쁜 말과 시선, 거친 행동으로 폭력을 가하는 사회에서 몸이 아프고 불편한 아이들이 스스로를 보호할 수 있으려면 먼저 상대방이 자신들에게 뭔가 나쁜 말을 하고 있다는 것부터 인지해야 한다. 그래야 그 언어폭력 가해자들에게 적극적으로 대응할 수 있고, 아픈 사람도 사람이라고, 함부로 대해서는 안 된다고 말해줄 수 있기 때문이다.


그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아픈 아이들에게 욕설부터 가르쳐야 하는 사회. 욕이 무엇이고, 왜 사람들은 누군가를 향해 욕을 하는지, 또 욕은 왜 나쁜지부터 가르쳐야 하는 사회. 그건 우리가 사는 세상이 아픈 사람들을 '비정상'의 범주에 넣고 제멋대로 하찮게 보는 사회이기 때문이다. 아픈 아이들이 살아남기 위해 독한 마음으로 버티며 무기를 갖추거나 철인이 되어야 하는 곳. 비록 나는 그런 세상 속에 케이티를 내놓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아이에게 욕을 먼저 가르치고 싶진 않다. 그 대신 나는, 세상을 바꾸고 싶다. 내 아이를 무장시키는 건 세상을 바꾸는 일보다 훨씬 쉽겠지만, 그건 결국 이 잘못된 현실을 용인하고 그대로 두는 것과 같으니까. 작은 입을 오물거리며 이제 갓 말을 떼기 시작한 아이를 보며, 이 아이에게 욕을 먼저 가르칠 수는 없다고 가만히 다짐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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