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쓰는 엄마의 '인연' 만들기 생생육아

내가 처음 개인 블로그를 연 것은 2009년 초. 

석사 논문을 쓰면서 이런저런 잡념에 시달릴 때 

짧은 생각거리들을 털어내고 정리하기 위해 만든 공간이었다.

말수가 적고 사람들 앞에 잘 나서지 않는 성격이면서 생각이나 화법은 급진적인데가 있고, 

그런 반면 말이나 글로 제대로 정리해 내는 능력이 떨어지다보니 속풀이 할 데가 필요했다.   

그저 독백처럼 끄적이던 공간이었고, 

그곳을 그 이상으로 활용할 수 있을거라 생각하진 않았다.  

 

그런데 

결혼을 하고, 미국으로 유학을 오면서 

내 블로그를 찾는 사람이 늘었다. 

우리의 안부가 궁금한 친정/시댁 식구들, 나와 남편의 친구, 선후배들이 대부분이지만, 

가끔 모르는 사람에게서 뜻밖의 덧글이나 이메일을 받기도 했다. 


단순히 특정 '정보'를 찾기 위해 연락하는 사람도 있고,

(노력은 없이 그저 누가 떠 먹여 주기 바라는 심보로 무턱대고 연락해오는 거, 정말 싫다!) 

'외롭고 힘든' 객지 생활, 친구하자며 연락하는 사람도 있다.

(나는 여기가 객지란 생각을 안 하고 사는데다 

정서적/정치적으로 한국 사람들과 오히려 말이 더 안 통하는 경우가 많아서 이것도 싫다!)

그러다보니 이런 낯선 사람들과의 교류는 그다지 좋은 인상을 남기지 못한다.  


그런데 케이티가 생기고 나자 사정이 달라졌다.

육아 이야기, 병원진료 이야기 등 그동안과는 완전히 다른 소재들로 글을 쓰기 시작하니

자연히 새로운 '독자'가 생기기 시작했다. 

그렇게 만난 K님은 내가 엄마로서, 또 글을 쓰면서 만난 첫 인연이다. 


K 언니는 뉴욕에 사시는 한국 교포 워킹맘. 

'3주 급성장기'를 검색어로 넣고 이리저리 검색하다 내 블로그에 들어오게 됐다며 덧글로 인사를 건넸다. 

그 첫 덧글을 시작으로 우리는 이제 SNS(페이스북)며 손수 쓴 카드 한 통으로도 서로의 안부를 묻는 사이가 됐다.  

케이티의 발에 맞는 신발을 찾을 수 없어 혼자 울어가며 재봉틀을 돌려 신발을 손수 만들던 그 때 

K 언니의 배려와 도움으로 아이 발에 맞는 맞춤 신발을 주문해서 받을 수 있었고,

돌아가신 할머니 생각에 시시때때로 눈시울 붉히던 그 때

K 언니가 보내 온 카드 한 장에 마음을 다독였다. 

비슷한 월령의 아이를 키우는 입장이어서 공감대가 컸던데다, 

가난한 학생 신분의, 아픈 아이의 부모인 우리에게 응원을 보내주고 싶으셨던 것 같다.

언니 같은 배려와 친구 같은 친근함으로 '교포'에 대한 나의 편견을 깨트려 준 K 언니와의 인연은 

어린 시절에 이민 와 갖은 어려움을 겪으며 성장한 세대의 고충을 조금 더 이해하는 계기를 만들어주었다.  

   

블로그에서만 글을 쓰다, 

어느 순간 블로그 바깥으로 한 발 나가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케이티와 함께 살며 조금 더 용기가 생긴 걸까. 

내가 하고 싶은 말, 완벽히 정리되지 않은 설익은 글이라도 

세상을 향해 내놓는 연습을 해보고 싶었다. 

그렇게 찾은 곳이 베이비트리였다. 

때로는 내 의도와 다른 해석과 반응에 갸우뚱, 했고

내 모자란 글쓰기에 한숨 쉬었고, 

어떻게 하면 조금 낯설고 불편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읽고 생각할 수 있는 글을 쓸 수 있을까 고민했다. 

그러는 와중에 이 곳에서도 좋은 인연을 많이 만났다. 

'생생육아' 고정 필진은 물론이고, '속닥속닥' 게시판을 통해 만난 분들과 그 분들의 이야기 모두가 내겐 '인연'이었다. 

일하는 엄마도, 전업 육아를 하는 엄마도, 모두 각자 특별한 재능이 있다는 사실을 절실히 깨닫는 경험이었다. 

세상 모든 엄마들이 이렇게 자신의 재능을 꺼내 놓고 가꿔간다면 세상이 지금보다 훨씬 더 풍요로워질텐데, 싶었다. 

내 아이를 키워낸 경험으로 쌓인 지식을 아낌없이 나누는 공간, 

엄마로서 내 몸/내 마음 아파본 경험으로 쌓인 지혜를 서로 나누며 다독이는 공간. 

그런 곳이 베이비트리였다.  


올 연말, 

이렇게 베이비트리에서 만난 인연은 내게 '산타'가 되어 나타났다.   


얼마 전 화장지로 신나게 노는 케이티 이야기를 쓰고 난 직후, 이메일 한 통을 받았다. 

그리고 나서 얼마 뒤, 두 상자 가득 장난감 선물을 받았다. 

미국에 정착한 지 10년이 다 되어 간다는, 

열 살 아들이 쓰던 장난감을 케이티에게 물려 주시겠다는 한 엄마 독자의 선물이었다.

상자에서 쏟아져나오는 장난감 자동차며 동물 인형, 로봇을 보고 케이티는 그야말로 환호성을 질렀다. 

한창 자동차 사랑에 빠진 케이티는 자동차를 줄줄이 이어붙여 놀기도 하고,

여러 엄마들의 덧글을 참고해 엄마가 만들어 준 터널 위에 자동차를 놓고 미끄러트리며 놀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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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또 며칠 뒤, 이번엔 멀리 한국에서 상자가 하나 날아왔다. 

그 상자를 보내주신 주인공은 바로, 

화순에 계시는 '생생육아' 필자, 안정숙 님!

묵직한 상자 속에는 귀한 책 세 권과, 

귀한 먹을거리, 

생활용품, 

그리고 따뜻한 편지 한 통이 들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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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숙 님에게서 처음 연락을 받은 것은 벌써 몇 달 전. 

깻잎 종자를 부쳐주면 받아서 심어 보겠느냐는 내용의 이메일이었다.  

'속닥속닥' 게시판에서 농부우경 님의 글을 읽다가 

깻잎 이야기를 주고 받게 된 것이 그 시작이었다. 

깻잎이야, 구하려면 여기서도 얼마든지 구할 수 있을테지만

가족도 친구도 아닌, 같은 온라인 공간에서 글로 마주친 게 전부인 누군가가

내 사정, 내 마음을 이렇게나 알아준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깻잎 종자는 사양했지만, 그 이메일을 계기로 베이비트리에 좀 더 열심히 자주 들어오게 되었던 것 같다.) 


그리고 몇 달 뒤, 

할머니를 보내며 힘든 마음을 글로 풀며 달래던 그 때, 

다시 이메일을 한통 받았다.   

이번에도 정숙 님은 글쓰기를 통해 할머니를 떠나보내는 내 마음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고, 

나는 큰 위로를 받았다. 

앞으로의 내 글쓰기가 기대되며, 또 응원한다는 그 따뜻한 말 한마디가 내겐 정말 큰 힘이 되었다. 

'깻잎'에서 시작된 개인적인 연락이

이렇게 커다란 '종합선물상자'가 되어 우리 집 한켠을 장식하게 될 줄이야! 


베이비트리와 함께 한 올 한 해는 유독 오래도록 기억될 것 같다.  

내년에는 더 많은 분들이 더 많은 재능과 지혜를 나누는 공간이 되었으면 좋겠다. 

책 쓰는 엄마, 시 읽는 엄마, 그림 그리는 엄마..

농사 짓는 아빠, 노래하는 아빠, 요리하는 아빠..

글 쓰는 할머니, 사진찍는 할아버지 등등

더 많은 이야기가 살아 움직이는 공간이 되었으면 좋겠다. 


그리고 그 많은 공통의 이야기들 가운데

깻잎종자며 장난감 자동차 같은 시시콜콜한 이야기들이 

은밀하게 비밀스럽게 오가는 인연들이 더욱 많아지면 좋겠다.  

양다리여도 좋고, 삼각, 사각관계여도 좋다. 

학연/지연같은 고리타분하고 부패하기 쉬운 관계 말고, 

'생판 몰라도' 아이 키우는 사람이라 공유할 것이 많은 사람들. 

같은 고민거리를 안고 사는, '동지'가 필요한 사람들. 그게 우리 아니던가.

새로운 관계의 실타래들이 여기 저기 보이지 않게 얽혀서 우리를 이어준다면,

우리 아이들이 살아갈 세상은 지금보다 조금 더 좋아지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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