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 둘…, 뭐 잘못됐나요?

둘째의 성별을 알게 된 건 1년쯤 전의 일이다. 임신 14주째의 아이는 아들인지 딸인지, 선생님이 이번엔 어떤 식으로 설명을 해주실지, 솔직히 첫째 때보단 조금 덜 설레는 마음으로 병원에 갔다.


꼭 아들을 바라거나, 딸을 바라거나 한 건 아니었다. 아들이면, 큰 아이가 아들이니 둘이 잘 지내리라 기대했다. 딸이면, 아마도 우리 부부가 색다른 육아의 즐거움을 맛보겠거니 했다.

두둥! 드디어 선생님의 말씀.

“큰애가 아들이죠? 빨래만 열심히 하면 되겠네.”

새로 옷 살 필요 없이 큰 아이 옷을 물려입으면 된다는, 결국 아들이라는 뜻이었다. 기뻤다. 아내와 난 마주보며 빙긋 웃었다. 아이 둘 낳고 오손도손 살자 했던 바람이 이렇게 이뤄지는구나.



20121113_4.jpg » 한겨레 자료. 
마음으로 주위에도 알렸는데 반응이 이상했다. 대뜸 한숨부터 내쉬며 “이제 어떡하냐”라며 위로하는 사람도 있었고, “전생에 무슨 죄를 지었길래…”라며 어깨를 토닥여주는 사람도 있었다. “딸 봐야지. 셋째 낳아야겠네”라는 소리를 듣는가 하면, “아들 둘인 집은 집안꼴이 거의 동물원”이라며 ‘걱정’도 해줬다. “아들 옷은 예쁜 게 없는데” 정도의 타박은 그저 애교였다.

아이가 둘이면, 딸-딸이 금메달, 딸-아들이 은메달, 아들-딸은 동메달이고, 아들-아들은 ‘목메달’이라는 세간의 이야기를 알게된 것도 그 즈음이다. 그래서였나. 딸-딸 아빠인 옆집 아저씨는 어느날 엘리베이터에서 만나 “아니, 왜 이렇게 실력이 없나”라며 씨익 웃었다. 딸-아들 아빠인 내 친구는 “넌 딸 키우는 재미를 몰라서 어쩌냐”라며 히죽댔다.

너무들 했다. 물론 임신 소식을 전할 때 축하를 받았으니, 성별을 알았다고 굳이 또 축하하지 않는 것까진 좋다. 그렇다고 악담을 하나. 축복을 해달란 말이다, 축복을!

아내는 오기를 부렸다. “원래 아들이기를 바랐어요. 아들 둘이라 만족해요.” “큰 아이가 순해서 괜찮아요.” 만면에 웃음을 띠고 실제보다 더 많은 행복을 가장하며 말했다.

소용 없었다. “그래, 그렇게 생각하는 게 낫지”하며 돌아오는 말엔 여전히 안타까움이 묻어있었다. 심지어 병원 초음파실 선생님은 “딸 낳을까봐 걱정하셨나봐요. 친정 엄마랑 사이가 안 좋으세요?”라며 아내를 ‘동정’해주기도 했다. 아! 뱃속 아기가 다 듣는다! 미안하지도 않느냐!

애초 아내는 둘째를 갖긴 어렵겠다고 했다. 커리어 걱정, 육아 걱정이 컸다. 내가 아빠 육아휴직을 했지만 언젠가는 돌아가야 했다. 나는 아이가 외로울테니 하나 더 낳자 했지만, 아내는 하나로 만족하자고 나를 설득했다.

하지만 어느날 아이의 외로움을 실감한 뒤 아내는 마음을 바꿨다. 형네와의 식사 자리였다. 형네는 딸-아들을 둔 은메달 가문이고, 형네 아들은 우리 큰아이보다 2달 빠른 형이라, 친구처럼 지낸다. 아이는 그날따라 유독 헤어짐을 아쉬워했다. 사촌형이 누나와 함께 총총 사라진 곳을 한참 멍하니 바라보더니, 집에 오는 내내 사촌형 이름을 줄기차게 불렀다. 둘째를 갖자는 내 설득은 그때 바로 먹혔다. 둘째의 잉태는 물론 우리 부부에게도 축복이었지만, 아이를 위해서라는 이유도 컸다.

그렇게 태어난 둘째가 이제 백일이 되어간다. 아내는 당장은 힘들어도, 십몇년 뒤 훈남 2명을 좌우에 거느리고 다니는 꿈을 꾼다. 악담하신 분들에게 그때 가서 본때를 보여주겠다며. 목메달의 진가는 그때 나오는 거라며.

** 이 글은 월간 육아잡지 <맘&앙팡>(디자인하우스) 2012년 7월호에 실린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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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ofile아이 둘의 아빠인 <한겨레> 정치부 기자. 21세기 인류에게 육아는 남녀 공통의 과제라고 믿는다. 육아휴직 등으로 나름 노력해봤지만 역시 혼자 가능한 일은 아니며, 사회적 인식의 전환이 필요하다는 걸 어렴풋하나마 알게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