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에게 말 걸기 2 '밤나무' 나무를심는사람들

* ‘국립공원을지키는시민의모임 지리산사람들’이 발간하는 계간신문 ‘지리산인’ 2011년 가을호에 실린 글입니다.

 

햇살 강해지는 6월, 길을 걷다 비릿한 향기에 고개를 들면 어김없이 밤꽃이 보인다. 레게머리를 닮은 밤꽃은 냄새가 특이하여 속을 메스껍게도 하고, 과부와 송곳이 나오는 옛이야기가 생각나 피씩 웃게도 한다. 지리산자락에선 밤꽃내가 사라질 즈음 더위와 장마가 시작된다.

밤꽃이 진 후 더위를 피해 밤놀이를 나가면 밤산에서 발하는 푸른빛에 깜짝 놀라게 되는데, 푸른빛의 정체는 밤나무에 사는 벌레를 유인해 태워버리는 포충등이다. 정부와 지리산권 지자체는 밤산에 헬기로 뿌리는 농약이 지리산국립공원, 백운산 생태경관보전지역만이 아니라 주변 숲과 농작물에 좋지 못하다는 여론이 있자 밤산에 포충등을 설치해줬다. 포충등 설치로 밤 농가는 친환경농산물에 등록하고, 무농약직불금도 탔지만, 포충등은 해가 갈수록 밤벌레를 잡는데 별 역할을 못한다고 한다. 밤나무와 밤이 벌레에 약한 것은 사실이나 산을 대규모로 간벌하여 밤산을 만든 결과 더 많은 벌레가 모이고, 더 강력한 병이 생긴 게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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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나무는 원래 온대지방에 자라는 나무이다. 따라서 열대지방과 같이 너무 더워도 안 되고, 추위가 심해도 못 쓴다. 우리나라로 말하자면 신의주와 함흥을 연결하는 선의 이남이 밤나무 적지이다. 지리산자락은 예로부터 밤 생산지로 유명한데 허균이 쓴 도문대작에는 지리산에는 큰 밤이 나는데 그 크기가 주먹만 하다고 기록하고 있다. 구례와 남원 경계에 있는 밤재, 산청의 밤머리재도 밤과 관련한 지명일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언제부터 밤나무가 재배되었는지는 확실치 않지만, 낙랑시대 것으로 추정되는 무덤에서 밤이 발견되어 재배 시기가 2000년 이상이지 않을까 짐작하게 한다. 밤은 구황식량, 관혼상제에 빼놓을 수 없는 필수품으로 옛날부터 중앙정부 차원에서 보호, 권장하였다.

고려시대에는 밤나무를 뽕나무, 옻나무, 닥나무, 배나무, 대추나무 등과 함께 농경지를 제외한 토지에 심도록 권장하였다. 조선시대에는 옻나무, 뽕나무 등과 함께 밤나무를 벌채한 자도 처벌하였고, 밤 생산 농민들은 국가에 제공하는 부역을 제외시켜 주었다. 일제시대에는 철도건설용 침목으로 많은 밤나무가 벌채되어 밤나무 숫자가 눈에 띄게 줄어들었는데, 지금처럼 지리산자락 야산이 밤산으로 바뀐 것은 1960년대 후반부터 산지자원화 계획에 의해 밤나무를 전국적으로 보급하면서 부터이다. 한때 호황을 누리던 밤 산업은 밤벌레, 냉해, 중국산 밤 등으로 힘든 시기를 맞이하고 있다. 시절을 반영하듯 지리산자락엔 밤농사를 포기하고 밤산을 방치한 농가가 늘어나고 있다. 이러다가 우리 땅에서 나는 밤, 그 밤꽃을 먹은 벌들이 만든 밤꿀 등이 사라지는 게 아닐까 걱정스럽다.

 

밤은 학술적으로는 열매이며, 씨앗-종자-가 아니라고 한다. 그런데 밤 종자란 말을 흔히 쓴다. 또 밤 종자 놓고 제사 지냈다는 말은 하지 않고 밤 과실 놓고 제사지냈다는 표현을 쓴다. 쓰는 곳에 따라 밤은 과일도 되고 씨앗도 된다.

나무 씨앗이나 열매는 싹이 틀 때 껍데기를 머리에 덮어쓰고 땅 위로 올라오는 것이 있는가하면, 땅 속에다 껍질을 남겨두고 싹이 트는 것도 있다. 밤 껍데기는 뿌리에 10년이나 100년이 지나도 썩지 않고 붙어 있다고 한다. 물론 과장된 말이지만 다른 나무에 비해 더 오래 붙어 있는 것은 사실이다. 이러한 까닭에 밤나무는 근본, 조상을 잊어버리지 않는 나무로 알려지고 있다. 해서 사당이나 묘에 두는 위패는 밤나무로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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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나무가 근본을 잊지 않는 나무라면, 밤은 따뜻하고 포근함이 가득한 과실이다. 찐 밤은 운동회 때면 단골로 등장하며, 군밤은 맛과 향이 겨울 새참으로는 최고이다. 두보의 시에 山家蒸栗暖(산가증율난)이란 구절이 있다. ‘시골집에서 방금 쪄낸 따뜻한 밤’이란 뜻인데, 이 구절은 산 속 어떤 집에 귀한 손님이 왔는데 대접할 것이 없어 찐 밤을 내놓았고, 따끈따끈한 찐 밤을 놓고 손님과 주인이 흐뭇한 미소를 짓고 있는 장면을 연상하게 한다. 올 가을엔 찐 밤이든, 군밤이든 밤으로 인한 이런 저런 사연에 얽히고 싶다.

 

글_ 윤주옥 사무처장 (국립공원을지키는시민의모임), 사진_ 허명구 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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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ofile안녕하세요. '국립공원을 지키는 시민의 모임' 사무처장 윤주옥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