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산을 바라보며 자라니 벼들도 행복하겠구나!/ 다시걷는 지리산만인보 5-2 지리산자락을 거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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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자락에 사는 주민들은 4월 말부터 벼농사를 준비한다.

4월 말이 되면 주민들은 마을회관이나 공터에 모여 싹 틔운 볍씨를 모판상자에 파종한다.

모판상자에서 자란 벼는 5월말부터 논에 심어진다.

지리산 북쪽인 남원, 함양은 5월 말, 지리산 남쪽인 하동, 구례는 6월 중순 모내기를 한다.

5월 말 지리산둘레길을 걷는다는 건, 지리산자락에서 모내기하는 걸 볼 수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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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판을 옮기고, 모내기를 하고, 이제 막 뿌리를 내린 벼들이 잘 자라고 있는지 살피는 농부의 걸음이 잦아지는 때,

봄과 여름의 경계인 계절,

지리산만인보는 남원 매동에서 함양 금계를 걸었다.

 

남원 매동에서 함양 금계로 가는 길은 '사단법인 숲길'이 지리산둘레길을 개척하며 가장 먼저 개방한 길이다.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진 만큼 걷는 사람도 많고, 하루 이틀 쉬어갈 곳도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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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판개 이장은 마을 모양이 매화꽃을 닮은 명당이라서 매동이란 이름을 갖게 되었다고 했다.

매동은 고사리, 취나물 등 산나물 맛이 일품이고, 지리산둘레길에 오는 분들을 위한 민박도 넉넉하다고 자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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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매동마을 곽판개 이장

 

매동마을회관을 출발하여 언덕길을 오르면 밭길이 나온다.

지리산둘레길 1호인 이 길은 주민들이 고사리, 고추 등을 농사짓는 곳인데

길을 걷는 사람들이 별 생각 없이 농작물에 손을 대어 주민들과 갈등이 생긴 곳이기도 하다.  

지리산만인보 걷는 이의 약속, '주변의 농작물과 열매는 주민과 야생동물의 것으로 손대지 않습니다.'는 상생을 위해 꼭 지켜져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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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덕길을 오르며 숨이 목까지 차오를 즈음 밭에서 만난 아주머니는 손을 흔들어 주었다.

손에 흙이 가득했다.

저 손이 흙을 만나 씨앗을 뿌리고, 김을 매고, 물을 준다.

저 손이 흙을 만나 먹을거리를 만든다.

저 손과 저 흙은 세상을 살리고 세상을 바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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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에서 중황까지 가는 길은 밭과 숲이 자연스레 연결되고, 생각을 내려놓고 걷기 좋은 숲길이다.

길을 걷다보면 아름드리 개서어나무를 만난다.

개서어나무는 서어나무 사촌쯤 되는 나무로 오래된 숲에서 볼 수 있는 나무다.

개서어나무, 서어나무가 어우러진 숲은 걷는 것만으로도 마음을 편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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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개서어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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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메리카 인디언들은 5월을 오디 따먹는 달, 옥수수 김매 주는 달, 구멍에 씨앗 심는 달, 밭가는 달 등으로 다양하게 불렀다 한다.

아메리카 인디언과 마찬가지로 지리산자락의 5월도 복잡하고 다양하다.

5월 말 지리산자락에서는 새잎이 나고, 꽃이 피고, 열매가 맺힌다. 

 

지리산만인보는 매동에서 금계까지 걸으며 숲과 논밭가에 살고 있는 풀과 나무의 다양한 모습에 신기해했다.

숲과 논밭가에는 한 가지 색으로는 표현하기 힘든 밝고 오묘한 꽃들이 피어있었다.

 

흰빛을 띤 쇠별꽃, 큰꽃으아리, 토끼풀, 꽃마리, 참꽃마리, 둥글레, 망초, 은대난초 등과

노랑색인 산괴불주머니, 젓가락나물, 애기똥풀, 꽃다지, 돌나물, 뱀딸기, 괭이밥, 뽀리뱅이, 씀바귀, 고들빼기 등과  

붉은 빛의 금낭화, 갈퀴나물, 자운영, 엉컹퀴, 조뱅이, 꿀풀, 쥐오줌풀 등과

보라빛으로 빛나는 으름덩굴, 제비꽃, 붓꽃 등과 꽃인지 잎인지 구분하기 힘든 초록색의 뚝새풀 등이 피고 지는 때가 5월 말이다. 

풀만이 아니라 보리수나무, 산딸나무, 때죽나무, 찔레꽃, 층층나무, 노린재, 국수나무, 아까시나무, 죽단화, 오동나무 등의 꽃도 피고 진다.

이 꽃들은 지리산자락에서만 볼 수 있는 꽃들이 아니다.

한반도 어디에나 있는 꽃들이다. 그러니 더 정겹고 마음이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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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운영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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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때죽나무 꽃

 

5월 말엔 숲에서 열매를 맺으며 다음해를 준비하는 

팽나무, 벚나무, 딱총나무, 신나무, 뽕나무, 감나무, 탱자나무, 쇠물푸레나무, 호두나무 등을 볼 수 있는데

앙증스럽게 달려있는 열매들은 '이게 뭐야, 세상에 귀여워라!'란 감탄사를 반복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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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탱자나무 열매

 

숲의 변화무쌍함은 꽃과 열매만이 아니라 소리로도 느낄 수 있다. 

숲속에 서 있으면 멀리서 달려오는 바람소리가 세차게 들린다.

소리로는 북풍한설이나 살갗에 닿는 바람은 부드럽고 포근하다.

햇살은 따가워지고 바람은 부드러우니 숲으로 향하게 되는 때가 5월이다.  

 

밭길, 숲길을 걸어 중황으로 가다보면 산인지 밭인지 분명치 않은 곳에 하황댁 아주머니가 하는 쉼터가 있다.

주말이든, 평일이든 이 쉼터엔 사람들이 많다.

아주머니는 도토리묵을 시키면 밭에서 상추를 뜯어다 무쳐주시고, 수수떡을 시키면 토종꿀을 찍어먹으라고 내놓는다. 

딸처럼, 손자처럼 그렇게 대해주신다.

아주머니는 하황에서 태어나 같은 마을 총각과 혼인하여 지금은 중황에 산단다.

 

평생 농사만 짓던 아주머니는 2년 6개월 전에 쉼터 사장이 되었다.   

'어느 날 고사리밭에서 고사리를 끊고 있는데 사람들이 내려와.

좋은 꽃도 없는 곳에서 어쩐 일로 사람들이 내려오는가 했더니, 사람들 말이 둘레길이 생겨 이제 많이 올거라고.

혹시나 해서 꿀을 팔려고 꿀단지를 놓고 앉아있는데, ' 한잔 합시다.' 이러는 거야.

술 아닌디요 꿀이요, 산에서 내려오는 물에 꿀을 타주니 맛있게 먹으며 막걸리와 파전을 팔면 잘될거라지.

내가 술장사 안 좋게 생각했는데 자꾸 하라 해서 시작하게 되었어.

이름도 없었지. 다녀간 사람들이 다른 사람에게 얘기하고 싶은데 이름이 있어야 할 거 아닙니까 이러지.

자주 오는 분이 지어준 거라, '정을 담은 다랭이쉼터'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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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을 담은 다랭이쉼터 하황댁 아주머니

 

예전에 매동에서 금계까지 걸어본 사람이 이 길을 다시 걷게 된다면 많아진 쉼터와 매점에 놀랄 것이다. 

지리산자락에서 토종벌을 키우던 농민들이 토종벌 집단폐사 후 먹고살 길이 막막하니 쉼터를 냈다고 한다. 

하나, 둘 생기기 시작하던 쉼터가 지금은 20개도 넘는다.

지리산둘레길이 티브프로그램에 나온 후 반짝 장사가 되었지만

지금은 그때와 달라 장사도 안 된다니 농촌에서는 농사를 지어도, 장사를 해도 걱정스런 일만 많아지는가 보다. 

 

중황에 들어서자 멀리 등구재가 보였다.

등구재는 전북 산내 상황과 경남 마천 창원이 경계를 이루는 고개로 거북이가 기어 올라가는 지형을 닮았다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등구 마천 큰애기는 곶감 까기로 다 나가고,

효성 가성 큰애기는 산수 따러 다 나간다.'는 민요가 구전될 만큼 감나무가 많은 곳이다.

옛사람들은 창원에서 인월장을 보기 위해 등구재를 넘어 다녔다고 한다. 등구재는 삶의 내력이 묻어나는 고개이다.

 

등구재로 올라가는 길에는 지리산을 바라보는 논과 밭들이 층층이 펼쳐져 있다.

벼도 지리산을 바라보고, 고추도 지리산을 바라보고, 고사리도 지리산을 바라보며 자란다.

지리산에서 불어오는 바람 맞고, 지리산에 걸렸던 비구름이 내려주는 비 맞고, 지리산이 뿜어내는 기운 받고 자라니

여기서 자라는 벼, 고추, 고사리는 신명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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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천왕봉을 바라보며 있는 논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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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구재를 내려와 창원까지 가는 길은 산을 흉하게 동강낸 길이다.

숲과 나무를 관리할 목적으로 만든 임도일 것이다.

숲을 동강내고, 나무를 잘라내고, 이 길은 누구를 위한 길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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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끄런 마음을 길가에 핀 층층나무 꽃이 달래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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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층층나무 꽃

 

길은 이런저런 생각을 하게 한다.

저 길의 시작과 끝이 어디일까 궁금하게 하고

저 길로는 어떤 동물들이 다니는지 엿보고 싶게 하고

이 길은 누구와 함께 가야 제격일까 싶어 이 사람, 저 사람 얼굴을 떠올리게 한다.

 

길을 걸으면 자꾸 뒤돌아보게 된다.

내가 걸은 길의 뒷모습을 보고 싶고

내가 걸은 길을 따라 또 누군가가 오고 있는지 확인하고 싶다.

걷는 길도, 삶의 길도

뒤돌아보고, 생각하고, 천천히, 함께 걸을 때 더 풍부해진다.

 

 

창원은 지리산둘레길 옆에 있는 마을이며, 천왕봉이 앞산인 마을이다.

창원은 돌담은 돌담대로, 돌담 안 감나무는 감나무대로, 구불구불 마을길은 마을길대로 마음을 평안하게 하는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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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현 이장은 창원이 해발 450m에 위치해 있으며, 벼농사를 주로 하며 곶감, 호두, 꿀 등이 많이 난다고 했다.

조선시대 마천에서 각종 세로 거둔 물품들을 보관한 창고가 있었다하여 '창말(창고마을)'이라 했다가

이웃 원정과 합쳐져 창원이 되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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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창원마을 김동현 이장

 

창원에는 진주에서 오랫동안 환경운동을 하다 4년 전 창원으로 들어온 김석봉 님(환경운동연합 공동대표)가 산다.

김석봉 님은 지리산만인보와의 만남에서 삶의 양식을 바꾸지 않으면 대규모 개발 사업은 필연적이라고

우리 모두 성장, 물질, 1등 중심 사회에서 소외될까봐 삶의 진정한 가치를 찾지 못하는 건 아닌지 되돌아봤으면 한다 하였다.

 

그는 지리산자락의 촌부이고 싶어 했다.

고사리가 나는 철에는 고사리를 끊고, 돌배가 익는 계절엔 돌배를 따러 다니고,

고추와 수박 농사를 잘 지어서 사람들에게 자랑하고 그렇게 살고 싶어 했다.

그를 집회와 강연회 장이 아닌 밭과 산에서 보고 싶은 건 모두의 바람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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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년전 창원마을로 내려온 김석봉 님

 

창원마을회관을 출발하여 숲길, 밭길, 논길을 걸으면 금계마을이 나온다. 

매동에서 하루를 시작하여

풀과 나무에 눈길을 주고, 이분, 저분과 이야기하며 걸었다면 금계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어스름 저녁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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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계에 있는 마천초교의탄분교터에는 지리산둘레길 함양안내센터가 자리하고 있다. 

화장실이 세워지고, 주차도 할 수 있어 걷는 이들은 편해졌으나 이런저런 건물이 들어서며 정감어린 모습을 잃어버려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매동부터 중황을 거쳐 등구재를 넘어 창원, 금계까지 오는 길은 지리산을 바라보며 걸을 수 있는 길이다.

이 길을 비 온 뒤에 걸으면 구름과 노니는 지리산을 볼 수도 있다.

이 길은 지리산을 바라볼 수 있어 사는 사람도 행복하고 걷는 사람도 행복한 길이다.

사람만이 아니라 풀과 나무도 행복한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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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_ 윤주옥 사무처장 (국립공원을지키는시민의모임), 사진_ 허명구 님, 윤주옥 사무처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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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ofile안녕하세요. '국립공원을 지키는 시민의 모임' 사무처장 윤주옥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