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일무장투쟁의 역사를 되짚다- ② 권기옥 기타분야



“조선총독부와 일왕궁을 폭격하고 싶었다”
한국 최초의 여성 비행사 권기옥

김동규 기자 ppankku@gmail.com

“독립투사 같은 영웅을 만들거나 미화하려고 한 것이 아니며, 면죄부를 줄 생각은 더욱 없었다.”

2005년 12월 29일 개봉한 영화 <청연>의 윤종찬 감독은 영화 개봉 전부터 거세게 몰아치는 반발에 대해 위와 같이 해명했다. 논란의 시작은 주인공 박경원의 친일 행각 의혹이었다. 한국인 최초의 여성 비행사로 알려진 박경원은 영화를 만들기 전부터 친일 인사라는 논란에 휩싸였던 인물로 ‘최초’ 여부에 대해서도 의혹을 사고 있었다. 박경원보다 먼저 비행기를 탔던 독립운동가 권기옥이 사실상 최초의 여성 비행사였기 때문이다. 배급사는 논란을 진화하기 위해 당초 ‘최초의 여성 비행사’로 홍보했던 광고 문구를 ‘최초의 민간 여성 비행사’로 고치기도 했다. 

이후에도 박경원에 대한 논란은 반론에 반론을 거듭하며 뜨거운 이슈로 떠올랐다. 결국 총 제작비 120억 원을 들여 만든 <청연>은 2주간 50만 관객을 동원하는데 그치며 흥행에 참패하고 말았다. 박경원이 친일이나 아니냐는 논란은 여전히 진행 중이다. 그러나 이 논란을 통해 박경원은 ‘최초의 민간인 여성 비행사’란 이름 하나는 널리 알렸다. 박경원보다 앞서 비행기를 탔던 ‘최초의 여성 비행사’이자 독립을 위해 목숨까지 내놨던 독립운동가 권기옥은 아는 이도 별로 없고 이제는 그 이름조차 희미해져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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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 최초의 여성 비행사 권기옥(항공독립운동사 연구자 이윤식 씨 제공)

물고문도 이겨내는 ‘악독한 계집’

권기옥은 어린나이에 독립운동을 시작했다. 1919년 3·1운동 당시 평양 숭의여학교를 다니던 19세 소녀 권기옥은 적극적으로 만세운동에 가담한 죄로 체포돼 6주간 구금당한다. 그러나 이에 굴하지 않고 출옥 후에도 임시정부의 연락원으로 활동하던 권기옥은 경찰의 주요 감시대상이 되기도 했다. 

임시정부가 발행한 공채 일만 원을 비밀리에 현금화 하는 데 성공한 권기옥은 임시정부 비밀 연락원 일을 했다는 죄로 6개월 실형을 받는다. 수감기간에는 천장에 거꾸로 매달려 물을 먹이는 혹독한 고문을 당하기도 하는데 이로 인해 학질을 앓기도 했다. 당시 다나카라는 일본 형사는 모진 고문에도 굴하지 않는 권기옥을 두고 ‘악독한 계집’이라며 혀를 내둘렀다고 한다.   

수감생활 후에도 권기옥은 독립운동을 중단하지 않았다. 1920년 봄에 출옥한 권기옥은 비밀 연락 업무를 재개하고 임시정부 공채 판매도 시도했다. 이 때문에 일본 경찰의 수사망이 점점 좁혀오기 시작했고 결국 밀항선을 타고 중국으로 망명하기에 이른다. 이때 권기옥의 여비를 대준 사람은 ‘조선의 간디’ 고당 조만식이었다. 조만식의 부친은 권기옥의 부친 권독옥의 스승이었다. 이러한 인연으로 권기옥이 어린 나이에 임시정부와 독립투사들 간의 연락을 맡았던 것이다.  

독립운동을 위한 날개를 달다

권기옥은 1917년 5월 미국인 아트스미스의 곡예비행을 직접 본 후부터 비행사의 꿈을 키워 왔다. 3·1운동 이후 권기옥의 꿈은 단순한 비행사를 넘어 더 큰 목표를 향해 있었다. 비행기를 이용해 조선총독부와 일왕궁을 폭파할 포부를 갖고 비행술을 배우기로 결심한 것. 

상해에 도착한 직후 비행학교를 알아보지만 여의치 않았다. 일단 김규식의 부인 김순애의 소개로 기독교계 학교인 홍도여학교에 들어가 중국어와 영어공부를 하며 2년 반만에 학교를 마친 권기옥은 하늘을 나는 꿈을 이루기 위해 다시 항공학교의 문을 두드린다. 갖은 노력 끝에 권기옥은 1924년 운남성 곤명에 있는 운남비행학교 입교에 성공한다. 당시 운남성은 군벌인 당계요가 지배하고 있었는데 임시정부의 요인이었던 이시영이 당계요에게 직접 추천창을 써준 덕분에 운남비행학교장의 강력한 반대를 극복하고 입교를 허락받은 것이다.

운남비행학교는 중국 서남단 외진 곳에 위치해있기 때문에 권기옥은 상해에서 베트남으로 돌아 먼 길을 가야만 했다. 여기에는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었다. 당시 중국에는 북경 근교에 남원항공학교, 보정항공학교가 있었고 광주에 광동비행학교, 곤명에 운남비행학교가 있었다. 1922년 당시 광동비행학교와 보정비행학교에는 비행기가 없었기 때문에 권기옥은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국립이었던 남원항공학교는 외국인인데다 여성이었던 권기옥을 받아주지 않았다. 항공독립운동사 연구가이자 소설가인 이윤식 씨는 “남원항공학교를 가지 않은 이유를 권기옥이 언급한 부분이 없어 확실한 이유는 알 수 없다”고 설명했다.

당시 운남비행학교에는 20여 대의 비행기가 있었다. 연습기는 프랑스제 80마력인 코드롱 복엽기와 150마력짜리 브리케이트 단발기, 이탈리아제 언살도가 있었다. 권기옥은 이 비행기들을 타고 2년이 넘는 시간동안 운남비행학교에서 비행술을 훈련받았고 1925년 2월 28일 졸업했다. 운남비행학교에서 그녀의 총 비행시간은 1,500시간 정도라고 알려져 있다. 

한편 권기옥은 이곳에서 목숨의 위협을 받기도 했다. 그녀를 집요하게 추적하고 있던 일본 경찰이 살인청부업자를 보낸 것. 다행히 조선인 동료들의 도움으로 외려 살인청부업자를 권총으로 사살해 위기를 넘긴 권기옥은 졸업 후 다시 상해로 돌아왔다. 권기옥 암살 시도 사례를 통해 일본이 항일투쟁을 벌이는 한인들에 대해 얼마나 치밀하고 집요한 감시를 벌였는지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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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35년 중국 선전비행을 준비하던 무렵의 권기옥(왼쪽에서 두 번째). 
(사진출처 : <조선총독부를 폭파하라, 우리나라 최초의 여류비행사, 권기옥을 말한다>, 정혜주, 공군 웹진 ‘공감’)  

중국에서 펼친 독립투쟁

상해임시정부는 장기적인 독립운동을 위해 무관학교를 설립하고 비행대 및 비행학교 설립도 추진했다. 당시 도산 안창호가 구상했던 비행대는 군사적 목적보다 정치적 목적에 치중해 운용할 예정이었다. 안창호의 구상은 1920년 1월 20일부터 2월 19일까지 쓴 일기에 잘 나타나 있다.

 그는 1920년 2월 17일자 일기에 “비행기를 사용하여 국내 인심을 격발하고 장래 국내의 대폭발을 일으키기 위함”이라고 적고 있다. 그러나 고가의 비행기를 구입하기란 쉽지가 않았다. 부단한 노력에도 150마일을 운항할 수 있는 장거리 비행기 구입에 실패한 안창호는 비행대를 이용한 선전은 물론 대륙 각지에 퍼진 독립운동조직들과 연락하려던 구상을 포기한다. 대신 광동정부 및 군벌 수하에 있는 비행학교에 한인들을 추천하는 차선책을 택한다. 

상해로 돌아온 권기옥은 임시정부 측에 조선총독부를 폭격할 비행기를 구입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임시정부는 이미 비행대 창설을 포기한 상태고 재정난으로 비행기를 들여올 돈이 없었다. 

임시정부가 비행기 구입이 어렵다는 것을 알게 된 권기옥은 대신 국민혁명정부에 들어가 일본군과 싸우기로 결심한다. 당시 수많은 조선청년들이 북벌전쟁을 시작한 국민혁명정부가 만주까지 점령할 경우 조국의 해방도 가능할 것이라 믿고 광동으로 향하는데 권기옥도 그 중 하나였다. 그러나 국민혁명정부도 항공부대를 만들 능력은 없었다. 대신 권기옥은 1926년 4월 20일 풍옥상 군벌 휘하의 서북군, 장지강 장군이 사령관으로 있던 항공처의 부조종사로 들어간다.

1927년 봄에는 국민군의 항공대가 발족하자 항공대 소령으로 임관해 창설 멤버로 활약하기도 했다. 1927년 3월에는 총사령 장중정 장군의 동로군 항공사령부 조종사가 된다. 1979년 8월 29일자 <서울경제신문> 인터뷰에서 권기옥은 “중일전쟁(1931-1932, 상해사변으로 추정) 때 상해 상공에서 폭격비행도 했지만 나의 소망이었던 조선총독부 폭격은 끝내 못해본 것이 한이라오”라는 말을 남겼다. 그러나 이에 대한 사료들이 남아있지 않아 정확히 확인하기는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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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경에서 재건된 대한애국부인회 동지들과 함께(오른쪽에서 두 번째).
(사진출처 : <조선총독부를 폭파하라, 우리나라 최초의 여류비행사, 권기옥을 말한다>, 정혜주, 공군 웹진 ‘공감’)
 


박경원과 권기옥의 ‘최초’ 논란

<청연>의 주인공 박경원과 권기옥은 누가 최초의 여성 비행사인지를 놓고 많은 논란을 빚었다. 항공사 전문가들은 대부분 권기옥이 최초라고 본다. 반론을 제기하는 측에서는 ‘박경원은 권기옥보다 1년 정도 늦지만 일본 민간비행학교를 졸업해 비행사 자격증을 취득했고 권기옥은 군사기관인 비행학교에서 졸업해 조종사이기 때문에 한국 최초의 비행사는 박경원이다’고 주장한다. 이는 “궁색한 논리”라고 다수의 항공역사 전문가들이 비판한다. 

“박경원이 최초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권기옥이 군사기관인 운남비행학교를 다니고 군인신분이라고 하는데 사실파악도 제대로 못하고 있다. 권기옥은 군사기관인 비행학교를 다닌 것은 사실이지만 1925년 2월 28일 운남비행학교를 졸업함과 동시에 민간인 신분으로 되돌아간 사실을 놓치고 있다. 다시 군인 신분을 취득한 것은 졸업 후 일년 정도 뒤인 1926년 4월 20일 풍옥상 군벌 항공대에 입대한 이후이므로 그 기간 동안은 민간인 신분이다.” 

소설가 이윤식씨는 최초의 문제가 중요한 이유는 일본이 박경원을 최초의 한국 여성 비행사로 인정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지적한다. 일본은 박경원을 최초의 비행사로 알고 있는 것에 머무르지 않고 매년 추모행사까지 하고 있다. 이를 통해 권기옥의 존재를 부정하게 되고 나아가 여성비행사 권기옥 여사의 독립운동 행적을 부정하는 것은 물론 일제 식민통치를 미화하거나 희석하는 수단으로 악용할 여지가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최초의 여성비행사가 누구냐’라는 제대로 된 인식 작업은 중요한 문제라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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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26.4.20 동로군 부비행원의 임명장
(사진출처 : <조선총독부를 폭파하라, 우리나라 최초의 여류비행사, 권기옥을 말한다>, 정혜주, 공군 웹진 ‘공감’)  

독립운동가로 친일과는 전혀 관계 없는 권기옥과 달리 박경원은 친일 의혹도 받고 있다. 

소설가 정혜주씨가 2006년 <오마이뉴스>에 기고한 박경원 관련 기사에 따르면 그녀는 고이즈미 준이치로 전 일본 총리의 할아버지 고이즈미 마차지로와 내연 관계에 있다는 의심을 받고 있다. 박경원이 자신의 비행기 ‘청연(푸른제비)’을 불하받는 과정에서도 고이즈미의 힘이 크게 작용했다고 한다. 또한 그녀의 죽음을 불러온 마지막 비행은 사실 만주국 승인을 기념하는 ‘일만친선 황군위문 일만연락비행’, 즉 친일 행각이었다고 밝히고 있다. 

곧 이어 기사에 대한 반론도 제기됐다. 일본인이 쓴 <박경원 평전>을 번역 출판한 홍대욱 씨가 ‘박경원에게 친일의 멍에를 들씌우지 말라’며 반론 기사를 쓴 것. 홍 씨는 고이즈미와의 염문설은 당시에도 문제가 많았던 황색 저널리즘에 불과하며 비행기를 얻는 데는 여권신장론자였던 친구 기타무라 겐코의 도움과 박경원 스스로의 노력이 결정적이었다고 주장했다. 

박경원의 친일 논란은 냉철한 시각으로 봐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 박경원이 일본 민간비행학교를 나온 사실, 비행을 위해 일본의 관리들과 교류한 사실, 일장기를 달고 비행한 사실만으로 친일파로 모는 것은 무리가 있기 때문이다.
 
편견을 깬 신여성 권기옥, 재조명 필요

1937년 중일전쟁이 발발하기 전 중국 공군에서 예편한 권기옥은 직접적인 전쟁 참여는 하지 않았다. 대신 국민군에서 참모학교 교관을 하며 정보수집을 업무를 하던 중 광복을 맞았다. 해방 후 1947년 귀국한 권기옥은 국회 국방위원회 전문위원으로 활동하며 대한민국 공군 창설에 기여했다. 이 때문에 ‘공군의 아주머니’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다. 

이렇듯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던 권기옥은 여성이라는 점에서 높게 평가할 수 있다. 일제 강점기는 보수적이고 여성차별이 심했던 시절이다. 해방 전 여성 비행사는 권기옥, 박경원 이정희, 김복남이 전부로 손에 꼽을 정도였다. 더욱이 남자 비행사들도 수가 그리 많지 않았다는 점에서 권기옥은 높게 평가할만하다. 소설가 이윤식 씨는 권기옥에 대해 “남자들도 비행사가 되기 힘든 시절, 또한 위험한 일이라고 기피하던 고정관념을 깨고 조종사가 된 것은 높이 평가할 일”이라고 전했다. 

그러나 권기옥에 대한 자료는 거의 남아있는 것이 없고 역사적 평가도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다. 물론 국가보훈처에서 1977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고 2003년 8월 권기옥을 이달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하긴 했지만 그것뿐이었다. 남자들의 성역인 항공 분야에서 고군분투하며 독립운동을 펼쳤던 신여성 권기옥을 기억하는 이는 극히 드물다. 영화 <청연>으로 인해 박경원이 ‘최초의 여성 비행사’라고 알려지는 바람에 권기옥의 존재는 더욱 희미해졌다. 독립운동가이자 최초의 여성 비행사, 이것만으로도 권기옥을 재조명해야 할 가치는 충분하다.

▲ 참고자료
「비행기로 민심을 격발하고 장래 국내의 대폭발을 일으키기 위함이라」, 이윤석 편저, 민미디어
<천황궁 폭파 위해 '날개의 꿈' 꾸다>, 정혜주, 오마이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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