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화] 양, 1만년전 농경과 함께 가축이 되다 생명건강

sn-domestication.jpg » 선사시대의 이 터키마을에서는 진흙벽돌 집들 사이에 어린 양들을 가두고 키웠다.http://news.sciencemag.org/  

 

1만400~1만100년 전 터키마을서 증거 발견

 

 인류 역사에서 식물재배와 동물사육은 가장 중요한 사건에 속한다. 그러나 고고학자들은 그 과정을 거의 포착하지 못했었다. 최근 애리조나대의 메리 스타이너 교수(동물고고학)가 이끄는 연구진이 1만1000년의 역사를 가진 터키 정착촌에서 초기 농부들이 야생 양을 우리에 가뒀던 흔적을 발견했다. 이는 오늘날 가축사육의 모태가 된 시발점으로 간주된다.
 고고학자들은 수백 개에 달하는 중동의 유적지들을 후보지로 지목해 왔다. 그러나 수백개의 유적지 중 농경 시작의 역사를 완벽하게 설명해 주는 곳은 거의 없다. 최초의 농경지로 인정받으려면, 지금으로부터 1만500~9500년 전 수렵·채집에서 농경으로 이행하는 변천기의 모습을 보여줘야 한다. 이런 측면에서 연구자들은 오랫동안 터키 중심부 멜렌디즈강 연안의 아시클리 휘위크 마을에 눈독을 들여왔다. 이곳은 여행객들에게는 목가적인 시냇물과 인상적인 화산지형이 공존하는 곳으로 유명한 곳이다.
 이 마을은 앞서 동물 가축화(animal domestication)의 초기형태를 보여주는 곳으로 꼽혀 왔다. 스타이너 교수가 이끄는 연구진은 우선 이 점부터 확인해야 했다. 첫째로, 연구진은 지층에 대한 방사성탄소 연대측정을 통해 이 지역의 역사가 1만400~1만100년이라는 결론을 얻었다. 둘째로, 연구진은 주변 지역의 식물 잔해를 분석하여 곡물, 콩, 견과류가 집중적으로 재배됐다는 증거를 얻었다. 그 지층의 바로 아랫부분에서는 염소, 들소, 사슴, 양과 같은 대형동물은 물론, 토끼, 거북이, 물고기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동물의 뼈가 출토되었다. 그중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양(50% 미만)이었다.
 

9500년전 지층에선 전체 동물의 90%가 양

 

양뼈를 분석한 결과, 몸집이나 나이 및 성별 분포에서 오늘날 농가에서 사육하는 양과 다른 것으로 밝혀졌다. 이는 양뼈의 임자가 야생양이라는 것을 시사한다. (참고로, 인간의 손길이 미치지 않는 야생동물들은 가축과는 달리 나이든 동물들이 많으며, 암수의 비율이 거의 1:1에 가깝다.)
 그러나 1만200년 전에 해당하는 지층에 이르자 상황이 달라졌다. 즉, 발굴되는 야생동물의 구성이 달라진 것이다. 구체적으로, 소형동물의 수가 눈에 띄게 감소하는 한편, (야생)양의 수는 꾸준히 증가해 염소의 3배 수준에 이르렀다. 약 9500년 전쯤에 이르자, 전체 동물 중에서 양이 차지하는 비중은 거의 90%까지 증가했다. 더욱이 양들의 암수 및 연령 구성을 분석한 결과, 인간이 적극적으로 관리한 듯한 모양새가 나타났다. 생후 6~7개월 이전에 사망하는 암양의 비율은 약 11%인 데 반해, 숫양의 사망률은 58%인 것으로 분석됐다. 이는 새끼를 얻기 위해 암양을 보존하려는 농부의 욕망을 반영한다.
 

00854897_P_0.jpg » 이라크 북부의 한 초원에서 풀을 뜯고 있는 양떼들. 한겨레신문 김정효 기자

 

마을 안팎서 발견되 양 배설물도 사육 증거

 

 그렇다면 야생양(herded-yet-still-wild sheep)은 어디에서 사육되었을까? 양이 사육되기 시작했음을 입증하는 증거는 마을 안팎에서 발견된 양의 배설물이었다. 연구진은 정착촌 내부에 빽빽하게 들어선 가옥들 사이에서도 다량의 배설물 잔해를 발견했다. 이 배설물을 현미경으로 관찰한 결과, 풀, 사초(莎草), 골풀 등으로 구성되었고, 다른 이물질들은 섞이지 않은 것으로 밝혀졌다. 이는 양의 배설물이 마구간에서 배출된 폐기물일 뿐, 흙벽돌, 모르타르, 연료 등을 만드는 원료로 사용되지 않았다는 것을 뜻한다.
 연구진은 “초기의 양들은 초기 농부들에 의해 자연에서 생포되어 마을 안에서 사육되었지만, 아직 야생의 형태를 지니고 있었다(오늘날 사육되는 양보다 체구가 컸다)”는 결론을 내렸다. 이 양들은 오늘날의 양들처럼 온순하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연구진은 매우 어린 양들을 마을로 들여와 어린이들을 위한 애완동물로 기르기도 했을 것으로 추정한다.
 

작물재배 위해선 정착해야 했으나 문제는 사냥

고민끝 사냥 대신 사육으로 고기 보충하려 한 것

 

 마을 주민들이 굳이 마을에 우리를 만들어 양을 기를 생각을 했던 이유는 무엇일까? 연구진은 이 마을이 멜린디즈 강가에 있다는 사실을 지적했다. “이곳은 토질이 비옥하여 작물재배에 이상적이기 때문에, 초기 농민들은 이곳에 눌러앉아 정착촌을 건설하고 싶은 유혹을 느꼈을 것이다. 그런데 수렵·채집 생활을 하며 떠돌아다니다가 한 곳에 정착하게 되면, 단점이 하나 있다. 그것은 먼 곳으로 사냥을 떠날 수 없다는 것이다. 짐승의 고기는 그들의 식단에서 여전히 중요한 메뉴였기 때문에, 농경생활을 한다고 해서 고기를 포기할 수는 없었다. 이 같은 사냥과 농경 간의 스케줄 갈등을 조정하는 방법은 단 한 가지, 야생의 양을 잡아다가 마을 안에서 사육하는 것밖에 없었다”고 연구진은 설명했다.
 이번 연구는 초기 농부들이 가축을 사육하게 된 과정을 어렴풋이 이해하게 해 준다. 즉, 농경생활로 인해 이동하지 못하게 된 인간들이 비교적 만만한(온순한) 동물을 선택하여 길들이기 시작했고, 거듭된 돌연변이와 선택을 통해 마침내 오늘날의 가축이 탄생하게 된 것이다.
 

초기 가축화 과정 입증 수확

 

“우리는 오랫동안 아시클리 마을에서 일종의 초기 가축화(동물 관리) 과정이 이루어졌을 것이라고 추측하며, 이 추측을 입증할 자료가 나오기를 학수고대해 왔다”고 코넬대의 네리사 러셀 교수(동물고고학)와 파리 국립 자연사박물관의 장-데니스 비뉴 박사(동물고고학)는 논평했다.
 그러나 스미소니언 연구소 산하 자연사박물관의 멜린다 제더 박사(동물고고학)의 의견은 좀 다르다. 그는 이번 연구의 세부사항에 대해 몇 가지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첫 번째 의문은 연구진이 양의 암수를 제대로 구별했는가라는 것이다. 양의 암수를 정확히 구별하려면 특히 어린 양의 골반뼈를 면밀히 검사해야 한다. 두 번째 의문은 양을 사육하기 시작한 것이 정말로 농경과 사냥 간의 스케줄 갈등 때문이었는가라는 것이다. 제더 박사에 의하면, 아시클리 마을은 농산물과 사냥감이 모두 풍족한 천혜의 장소였기 때문에, 정착민들이 양자 간의 갈등을 느끼지 않았을 것이라고 한다.
 “스케줄 갈등은 인류가 사냥·채집 사회에서 농경사회로 옮아가는 데서 가장 중요한 이슈인 것만은 분명하다. 그러나 양을 사육함으로써 그런 갈등이 얼마나 해결될지는 미지수다. 목축은 새로운 종류의 노동을 필요로 하며, 그로 인해 새로운 스케줄과 분업의 문제가 파생되었을 것이기 때문”이라고 러셀 박사는 말했다.
 
출처
http://mirian.kisti.re.kr/futuremonitor/view.jsp?record_no=246118&cont_cd=GT 
KISTI 미리안 『글로벌동향브리핑』 2014-05-07     
원문
http://news.sciencemag.org/archaeology/2014/04/how-sheep-became-livestock
※ 원문정보: Mary C. Stiner, “A forager?herder trade-off, from broad-spectrum hunting to sheep management at A?ıklı Hoyuk, Turkey”, PNAS April 28, 2014, Published online before print, doi: 10.1073/pnas.1322723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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