먹고 자고 걷고 마시고_ 11월 '나는 쉬고 싶다' 후기 지리산자락을 거닐다
2012.12.02 05:42 windjuok Edit
지리산에서, 일상에서 나온 10명의 여성들이 ‘나는 쉬고 싶다’란 조금은 도전적인 제목으로 ‘여성 쉼 프로그램’을 한다하자 말들이 많았다. ‘좋겠다, 정말 쉬고 싶다, 여자들만 쉬냐? 남자들고 쉬고 싶다, 거기까지 가려하니 그게 너무 복잡하다.’
2박3일, 마음은 있으나 시간을 낼 수 없었던 많은 여성들의 부러움 속에 용감하고 간절한 여성들이 천은사에 모였다. 여성들이 그곳으로 떠나면, 남성들과 아이들도 쉴 수 있으리란 생각과 아내와 엄마가 한 달에 한번은 푹 쉬기를 바라는 가족들의 협력으로 여성들은 길을 나설 수 있었다.
맑고 투명한 날이었다. 비소식이 있었으나 비는 내리지 않았다. 낮엔 햇살이 따스하고, 밤엔 별이 초롱초롱 했다. 낮엔 언뜻 스치는 바람 냄새가 좋았고, 밤에 계곡과 공간을 오가는 바람소리가 마음을 편하게 했다.
11월 23~25일, 천은사에 모였던 여성들은 12월에도 꼭 만나자고 했다. 여성 쉼 프로그램을 준비한 사무처는 뭐가 부족했을까, 뭔가 더 필요한 게 없는지 말해 달라 했지만 대답은 간단했다. 너무 바빴다고, 먹을 게 많았다고, 잘 쉬었다 간다고, 다시 오고 싶다고.
2박3일, 여성들은 뭘 하며 쉬었을까?
먹었다!
천은사 공양간 보살님들이 해준 밥을 먹었다. 흰죽에 총각김치만 먹어도 맛있었다. 천은사 곳곳에서 기른 야채와 군더더기 없는 양념 덕에 뒷맛이 개운하니 이를 닦지 않아도 좋았다. 배 가득 밥을 먹은 후에도 누룽지와 과일을 먹었다. 하는 일 없어도 잘 먹는 서로를 보여 흐뭇해했다.
남이 해주는 밥을 먹으니 참 좋다 하였다. 여성들에게 부엌은 애증의 공간이다. 부엌에서의 하루, 1년, 평생이 귀찮고 싫은 것만은 아니지만 부담스럽고 던져버리고 싶은 날도 있다, 다 놓고 떠나버리고 싶을 때도 있다. 어느 날 훌쩍이 아닌 계획하고 준비된 떠남, 잠시 쉬고 싶은 여성들은 남이 해준 밥에 감사했다.
잤다!
방장선원과 태고당을 오가며 잤다. 옛날 스님들이 공부하던 곳, 좋은 기운이 넘쳐나서일까, 누우면 잠이 왔다. 저녁에는 마땅히 잤고, 낮엔 간간히 잤다. 공식적인 낮잠시간도 있었지만 그게 아니어도 맘 편히 잤다.
눕기만 하면 잠이 온다고, 꿈도 안 꾸고 잠을 잔다고 이상해하며 잤다. 자다 눈이 떠지면 밖으로 나가 하늘을 봤다. 오리온자리가 겨울로 가고 있음을 알려줬다. 불빛으로부터 자유로운 산속 하늘은 어두우니 더욱 밝았다. 심오한 검은 빛이었다. 자다 눈이 떠지면 툇마루에 앉아 햇살을 받았다. 하늘과 나무 빛에 놀라 세상이 어찌 이리 아름다울까 놀라워했다. 사는 거, 별 거겠는가! 아름다울 때 감동하고, 기쁠 때 맘껏 웃고, 슬플 때 가슴 아파하면 되는 거 아니겠는가! 우리들처럼.
걸었다!
먹고 자는 틈새에 걸었다. 천은사 절 마당을 걷고, 절 뒤 숲길을 걷고, 지리산둘레길을 걸었다. 어디 있어도 맘 편한 날이었다. 뭘 입고 있어도 신경 쓰이지 않는 시간이었다. 걸으며 이야기를 나누고, 도랑에 사는 연가시에 신기해하고, 서리꽃이 핀 풀을 쓰다듬었다. 눈길 닿는 곳마다 신비스럽고, 살아있는 모든 생명체가 빛나는 날이었다.
규칙 없이 서성이고, 침묵하며 걷고, 걸다가 뒤를 돌아보기도 했다. 살아온 날들이 그러했듯이, 앞으로도 그리 살 것이다. 가끔은 서성이고, 문뜩 내가 왜 사나 돌아보게 되고, 무심하고 매정한 세상에 가슴 시릴 것이다. 그럴 때마다 걸을 것이다. 걸으며 만나는 자연에, 그 안에 존재하는 나의 소중함을 깨닫게 될 때 걸음을 멈추고 내 자리로 돌아올 것이다.
만났다!
모르던 사람을 만났다. 전생에 인연이 있었겠지. 우리로 인해 더 많은 일을 하게 된 공양간 보살님들의 편안한 얼굴을 만났다. 나도 다른 이에게 편한함일까? 몸이 건강해야 마음도 건강하다고 알면서도 잠시 미뤘던 일, 뻣뻣한 팔과 다리, 허리를 이리저리 움직이며 나를 존재하게 하는 몸에 온 마음을 집중했다.
평생을 화두를 붙잡고 깨어있기를 추구한 스님을 만났다. 지금도 스님의 수줍은 노랫소리가 귓가에 아련하다. 아름다운 마무리를 이야기하며 뜻밖의 만남에 눈가가 촉촉해졌다. 내 문제가 아니어도, 공감하고 걱정하고 고개 끄덕이게 하는 일들, 우리네 살아가는 모습이라 생각되었다.
온가족이 모여 김장을 하는 보기 좋은 이웃을 만났다. 먹어보라고, 우리 아들들, 내 며느리들 예쁘고 착하지 않냐고 행복해하는 어머님을 만났다. 내게 쉴 수 있는 시간을 준 가족들이 생각났다. 고맙고 감사했다.
이 세계 절반인 여성들에게, 매일을 부엌과 화장실을 오가며 뭔가를 준비해야 하는 여성들에게, 나보다 가족을 먼저 생각하고 저녁엔 쓰러질 듯 잠에 빠지는 여성들에게 한 달에 한번, 밥할 일도, 청소할 일도, 아이 챙길 일도 없는 날을 선물해주고 싶은 마음이었다. 따스하고 평화로운 지리산에서, 간소한 밥상, 따뜻한 잠자리, 여유로운 시간 속에 몸도 마음도 내려놓기를 바라는 마음에서였다.
12월 21~23일, 10명의 여성들은 다시 모일 것이다. 12월 ‘나는 쉬고 싶다’는 인적 드문 화엄사 구층암에서 진행된다. 11월 천은사에 만났던 여성들의 소박한 미소가 구층암에 다시 피어나길 바란다. 시끄러운 세상에서도 평화롭게 살아가는 지혜, 여성들이 만들어가리라 기대한다.
글과 사진_ 윤주옥 사무처장 (국립공원을지키는시민의모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