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신부 투쟁을 결심하다 생생육아

 
 신기하게도 임신 사실을 인지함과 동시에 임신 증상이 죄다 나타나기 시작했다. 알기 전엔 괜찮더니 알고나니 왜이런가 싶어 나 스스로도 꾀병인가 싶을 정도였다. 경찰서 기자실에 앉아있노라면 하염없이 졸음이 쏟아졌고 점심 시간이면 건물 안에 퍼지는 구내 식당 반찬 냄새에 구역질이 났다. 특히 고기 냄새가 미치도록 싫었다. 배가 당기고 취재원 한 명만 만나고 나도 쉽게 피로해졌다.
 
 경찰서 휴게실에 몸을 눕히는 날이 많아지던 어느 날, 함께 영등포 라인(서울의 강서, 영등포, 구로, 양천 경찰서를 뜻한다)을 출입하는 기자단의 회식이 있었다. 장소는 삼겹살집. 고기 냄새를 맡기가 두려웠으나 (임신 사실을 몰랐을 때) 내가 설레발을 쳐서 만든 자리니 안 갈 수가 없었다. 지글지글 익는 고기를 앞에두고 다같이 건배, 원샷을 했다. 술잔을 그대로 내려놓는 내게로 시선이 쏠렸다. 타사 후배 기자가 매서운 눈초리로 나를 살피며 묻는다. "선배, 혹시 임신했어요?"
 
 무서운 기자들. 덕분에 순식간에 임신 사실을 고백했다. 거의 모든 언론사 기자들이 다 있으니 상황은 마치 임신 발표 기자회견과 같았다. 타사 기자들은 큰 리액션으로 임신을 축하해주었다. 결혼한 줄도 몰랐는데 임신이라니 물 먹었다는 반응부터 일부러 밖에 나가 담배를 피우고 오는 모습까지 다양한 감동을 맛본 뒤 "임신부는 빠져 줄테니 2차는 편하게 즐기라"는 말을 남기고 귀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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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음날부터였다. 타사 여기자들이 내게 은밀히 말을 걸었다. "선배 회사는 임신하면 내근 부서로 바꿔주나요?" "임신했다니까 회사에서는 뭐래요?" "회사에서 육아휴직은 줘요?" "결혼에, 임신까지 하다니 선배 용기가 너무 대단해보여요." "저는 결혼도 자신이 없어요." 겉으로 보기에 화려해보이는 ‘커리어 우먼’들의 가슴아픈 모습이었다.
 
 한 방송사의 여기자는 이렇게 푸념을 늘어놓았다. "우리 회사는 임신하면 야근 하나 빼준 지도 얼마 안됐어요. 전설적인 아무개 선배 있잖아요. 그 분이 임신했을 때 "남자랑 똑같이 일하는 모습 보이겠다"며 부서도 안바꾸고 야근까지 다 해버렸거든요. 그 모습 본 뒤에 회사에서는 임신해도 야근까지 하는걸 당연시 여겨요. 몇 년 전 참다못해 한 선배가 "임신했으니 야근을 빼달라"고 투쟁한 끝에 요즘에는 간신히 야근을 빼주는 수준이 됐죠. 그러니 임신하는게 무서워요. 눈치도 보이고, 힘들어서 일을 어떻게 해요."
 
 또다른 여기자는 이렇게 말했다. "회사 선배와 연애를 하고 있어요. 연애 사실이 알려지고 결혼을 하게되면 남자 쪽은 손해보는 게 없겠지만 저는 어떻게 될지 두려워요. 일로 성공하고 싶은데… 그래서 결혼도 자신이 없어요. 선배는 어떻게 결혼할 생각을 했어요? 그리고 어떻게 임신까지 해요?"
 
 너무나도 똑똑하고 예쁘고 당차보이는 후배들의 이런 심경 고백에 무척 공감하면서도 매우 당황했다. 모두들 호수 위의 백조처럼 이리도 힘겹게 발버둥치며 버티고 있었단 말이냐. 임신을 확인한 뒤 엄습한 불안감은 나만의 것이 아니었구나. 좋다, 내 후배들을 위해서라도 세상과 투쟁하리라. 임신한 나를 조직과 사회가 단순히 ’질 떨어진 노동자’로 취급하지 않도록 내가 먼저 나서리라.
  
   물론 한겨레는 대한민국의 어떤 언론사보다 임산부의 인권을 보호해주는 곳이다. 여성 뿐만 아니라 남성 기자들도 아이의 양육을 위해 6개월 이상 육아휴직을 사용하기도 한다. 모두다 10여년 전부터 몇몇 선배들이 투쟁적으로 노력한 덕분이다. 어찌됐든 이 조직 안에서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임신부 투쟁’을 펼쳐보리라. 이러한 투쟁 결심은 의외의 결과를 낳았으니… 그 이야기는 다음 회에 계속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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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ofile‘노키드 부부’로 살아가려던 가련한 영혼들이 갑자기 아기를 갖게되면서 겪게되는 좌충우돌 스토리를 나누고자 한다.
임지선 한겨레 기자 sun21@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