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손주 vs. 친손주 태평육아

나는 비혼 상태에서 아기를 가졌고 출산했다. 처녀가 임신한 케이스에 당시에는 결혼도 안 하겠다는 입장, 나중에 백배 양보하여 살아보고 결정하겠다는 입장이었다. 찔끔찔끔 속을 썩여오던 내가 결정적 한 방을 날리자 집안도 발칵 뒤집혔다. 동네 사람들에게도 좋은(?) 가십거리를 던져준 셈이었다. 이렇게 나의 임신은 마냥 환영 받을 수 없었는데도 엄마와 아빠만은 달랐다. 결혼식조차 안 하겠다는 나의 말에 심히 낙담하면서도, 임신 자체에서는 “하늘이 주신 축복”이라며 기뻐해주셨다.



d94dea44825561a931721b43df748d08.그렇게 우여곡절 끝에 안아보는 첫 손주는 엄마 말대로 '축복'이고, '감동'이었다. 눈이 안 좋은 엄마는 소율이 때문에 눈이 밝아졌다고 했다. 아빠는 자려고 누우면 소율이 얼굴이 삼삼하다고 했다. 엄마, 아빠가 하도 소율이 소율이 하니, 친구분들이 손주 자랑하려면, 돈 내고 소율이 얘기하라고 할 정도로 엄마, 아빠에게 소율이는 삶의 중심, 세상의 중심이었다. 첫 손주인 소율이를 금지옥엽 예뻐라 하는 걸 보는 주위에서는 그랬단다.



“외손주가 예뻐 봤자, 친손주 반이라는 거 몰라?”



“외손주 봐 주느니 파밭을 맨다는 속담도 있어.”



"외손주는 외손주지, 손주가 아니지..."



주위의 온갖 방해공작에도 '요즘 세상이 어떤 세상인데 아들 타령이냐'며 자신의 얘기가 아니라 했고, 



나도  '요즘엔 외손주는 업고, 친손주는 걸리고, 외손주 추울까봐 친손주한테 빨리 걸으라고 한대'하며 맞장구쳤다.



 우리 부모님은 시골분 치고는 나름 깨이신(내가 하도 사고를 치니 나를 이해하려면 깨일 수 밖에 없는!) 분들이었고, '아들아들' 찾는 건 남의 얘기였다. 소율이는 엄마, 아빠에게 첫손주, 아직까지는 유일한 손주였다. 그렇게 한동안 독보적이었던 ‘소율천하’에 균열 조짐이 감지됐다. 다음 달이면 결혼한지 꼭 1년 되는 동생 부부가 임신을 한 거다.  그 소식을 전하는 동생에게  '이제 우리 소율이는 찬밥이네...'라며 웃으며 축하해주었다. 



5e859c848eece541e15b47c6f4e803da.임신 축하도 할겸 지난 주말에 동생 내외와 우리가 제천 집에 함께 모였다. 우리가 미리 내려가 있었는데, 아빠가 갑자기 폭탄 발언을 했다. “새아기 더울지 모르니 에어콘 살까?” 세상에…대박!!! 아빠 입에서 에어콘 소리가 나올 줄 몰랐다. 제천은 한 여름에도 덥지 않은데다 우리 집은 맞바람이 시원한 곳이어서 선풍기 없어도 사는 곳이다. 무엇보다 엄마랑 아빠는 너무나 검소한 미니멀리스트들이어서 일체 뭘 사들이는 것을 싫어하시는 분들이다. 그런 분들이 자진해서 에어콘? 나에겐 너무나 충격이었다. 내가 펄쩍 뛰자, 일단 에어컨은 사지 않고 넘어갔다.



점심 무렵에 동생 부부가 도착했다. 엄마는 동생이 좋아하는 삼겹살을 구우려다 올케가 입덫을 할지 모르니 물어보고 하자며 보류했다. 점심을 먹던 중 올케가 요즘엔 ‘삼겹살보다 소고기를 더 먹는다’는 말을 엄마는 ‘소고기가 더 맛있다’라는 말로 잘못 알아듣고 그 길로 시장에 나가 등심을 사왔다. 그것도 등심 10근을!!! 세상에 태어나서 꽃등심으로 배불러 보기는 처음이다. 맨날 풀만 뜯어먹다가 올케 덕에 우리도 양질의 단백질 공급도 받고, 나쁘지 않았다. 



우리는 먼저 올라왔고, 여름 휴가를 시작하는 동생부부는 집에서 하룻밤 더 머물렀다. 그 다음날 동생부부를 떠나 보내고 엄마한테 전화가 왔다. 평소와 달리 많이 흥분한 목소리였다.



8a2a4ede563274dc2a49b971bc7098f2.“새아기한테 좋은 소식이 있다”



“엉?”



임신 보다 더 좋은 소식? 박사 논문 패스했나? 아니면 혹시 쌍둥이인가?



“소율이 남동생 생긴단다…”



"뭐....?????!!!!!”



세상에...우리 엄마가 이럴 줄 몰랐다. 남들이 아무리 친손주니, 손자타령을 해도 우리 엄마만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엄마도 어쩔 수 없는 시골 노인인가? 주위에서 하도 들으니 자연히 세뇌당한 건가?  아니면 엄마가 본색을 드러낸 건가? 무서운 친손주 파워다. 이제 겨우 임신 3개월, 어쩌면 이건 전초전일지 모른다. 외손주 vs. 친손주 배틀에 어떤 일이 벌어질까? 엄마와 아빠는 나를 얼마나 더 놀래킬까? 흥미진진하다.ㅋ



손윗 시누이가 시샘하기도 모양 빠지고, 외손주에서 친손주(그것도 손자!!!)로의 무게중심 이동을 담담히 받아들일 수 밖에... 그런데 엄마의 흥분과 기대가 약간은 걱정된다. 나는 우리 사회가 사실상 모계사회라고 생각한다. 특히 가정 내에서 여성의 파워가 더 커지고 있음은 물론이고 모든 의사결정과 커뮤니케이션의 중심은 엄마다. 집안 모임도 처가 위주고, 시댁보다 친정에 더 많이 가고, 어려운 일도 친정에 더 많이 의지한다. 최근 실시한 설문조사에서도 우리나라 청소년들은 친가보다 외가 친척을 더 가깝게 여기는 것으로 나타났다. 가족으로 생각하는 범위도 고모는 가족이 아니고, 이모는 가족이라고 생각한다는 거다. '아들 손자 며느리 다 모여서' 노래를 한다는 개구리 노래도 '손녀 사위 딸내미 다 모여서~'로 바뀌어야 할 판이다. 나는 그럴 수 밖에 없는 이유로 여성이 커뮤니케이션 능력이 더 뛰어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나 역시 친정에 더 많이 의지한다.



나는 동생이 결혼할 때부터 엄마에게 세뇌교육을 시켰다. 올케가 시집 오는 게 아니고, 동생이 장가드는 거라고, 이제 그집 아들됐다고 생각하라고 수없이 말해왔다. 특히 올케가 딸만 둘인 집에 맏이이기 때문에 더 그랬다. 엄마도 인정했다. 그런 엄마가 자기 제사를 지내줄 지 모르는(결코 장담할 수 없는데도...) 손자가 생기자 이렇게 와르르 무너졌다. 앞으로 더 지켜봐야겠지만, 나는 엄마가 빨리 우리 소율이에게 돌아올 날을 기다린다. 아니...돌아올 수 밖에 없을 걸...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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