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쥐나무를 만난 날 자연 속의 단상

나도 정말 어지간합니다. 서당 개마저 삼년이면 풍월을 읊는다고 했는데 식물 분류학자를 쫒아 다닌 지 벌써 10년이 가까이 있건만 매년 만나는 식물이 볼 때마다 처음 만나는 것처럼 새로울 뿐이니 말입니다. 한 고비 넘어 이것과 이것은 서로 같은 것이고, 이것과 이것은 서로 다른 것이라고 동정(同定)은 된다 하더라도 그 다음 문제는 이름이 곧바로 시원스럽게 튀어 나오지를 못하고 버걱거린다는 것입니다. 한참을 걷다 간신히 생각해 내거나, 오락가락하다 끝내 포기하고 동료에게 다시 묻게 될 때가 많습니다. 기본적으로 관심의 차이에서 비롯하는 것이겠지만 들꽃 종류는 그런대로 아는 척을 알 때가 더러 있으나 나무 종류는 정말 쉽지 않습니다.

이 정도 따라다녔고 그 정도 반복해 주었으면 짜증도 날 때가 이미 지났고 “정말 바보 아니세요?”정도의 말이 나온다 해도 인정할 수밖에 없는데 언제나 웃는 모습으로 친절히 또 다시 알려주시니 그런 동료 또한 나와는 다른 면에서 어지간합니다. 그나마 제대로 기억하고 있는 것들은 이름이나 생태적 특성이 독특하거나 생김새가 어떤 형상을 꼭 닮은 것들입니다.

한 번은 때죽나무에 대하여 설명을 해준 적이 있습니다. 나무껍질이 진한 검은색이어서 나무껍질에 때가 많다하여 때죽나무라고 불렀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열매껍질에 있는‘에고사포닌’이라는 성분은 독성이 무척 강해 열매를 빻아 물에 풀면 물고기가 떼로 죽는다는 해서 떼죽나무로 되었다가 때죽나무로 바뀌었다는 이야기도 있다는 말을 해주었습니다. 그리고는 내가 들으라고 하는 말은 아니라는 듯 슬쩍 민망해하며 말문을 이어갔습니다. 편한 후배들에게 알려줄 때는 “다음에 이 나무가 무엇인지 기억하지 못하면 때려죽인다.”라고 하면 대부분 잊지 않더라는 이야기도 덧붙였습니다. 하지만 나는 그러한 때죽나무 조차 다음에 기억해내지 못한 적이 있습니다. 쑥스럽지만 변명거리는 있습니다. 나는 때죽나무의 꽃과 열매를 정확히 기억하고 있는데 꽃이나 열매는 시기를 정해 피고 맺혔다 사라지는 것이며 당시는 어느 것도 없었기 때문에 알아보기 힘들었다고 말입니다. 하지만 그동안 알려준 횟수를 생각하면 진짜 얻어맞아 죽는다 해도 할 말은 없습니다.

오늘은 잎의 모양이 박쥐가 날개를 활짝 펴고 있는 모습을 하고 있는 박쥐나무가 있어 그나마 체면치레는 한차례 했지만 다른 것은 역시 수도 없이 또 물어야 했습니다. 건망증의 문제가 아니라 간절함의 문제라는 것은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다른 친구들에 단단히 미쳐있는 터라 들꽃과 나무에 조차 똑같은 간절함을 보일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기억하지 못하는 것이 많고 기억하고 있더라도 쉽게 잊기도 하지만 들꽃과 나무의 이름을 알아가는 과정 자체를 놓치는 않으려 합니다. 들꽃과 나무의 이름을 안다하여 그 들꽃에 대해서 그리고 그 나무에 대해서 다 알았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이름을 기억하고 있다는 것은 적어도 그들에 대하여 알기 시작했다는 것만큼은 틀림없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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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쥐나무

 

그날 밤, 시험을 앞두고 있는 아들로부터 시험공부를 도와달라는 긴급 요청이 들어왔습니다. 거의 없는 일이라 너무나 고마운 마음에 흔쾌히 도와주겠다고 했습니다. 과목은 수학이었고 공부를 해야 할 주제는 이차방정식이었습니다. 물론 아들은 이차방정식의 근의 공식 그 결과만 빨리 외워서 빨리 문제 풀어 답 맞추고, 맞으면 바로 다음으로 넘어가고 싶어 했습니다. 하지만 아들을 간신히 달래 그것은 좋은 방법이 아니며 어떻게 해서 근의 공식의 결과가 그렇게 나오는지 그 과정을 유도할 수 있어야 한다며 열심히 설명한 것까지는 좋았습니다. 그러나 “지금 뭐하신 거예요?” 하는 눈빛에 처음에는 “아들, 모르겠니?” 하며 웃음을 지어 보이지만 시간이 조금 더 흐르면 일단 호칭이 아들에서 너로 슬슬 바뀌게 됩니다. “너, 정말 모르겠니?” 이 수준에 이르면 혈압 상승, 심장 박동수 증가는 이미 충분히 일어나 있는 상태가 됩니다. 그 다음에는 일단 ‘너’가 ‘야’로 다시 바뀌며 분위기는 가파르게 험악해집니다. “야, 이래도 모르겠어?”, “이런 바보 같은 …” 순간 스쳐가는 것이 있어 말꼬리를 삼켰습니다. 10년이 가깝도록 징그럽게 반복해주시면서도 “원래 그렇게 자꾸 까먹게 되요.” 하시며 웃음으로 힘을 주시는 동료의 모습과 소크라테스의 말씀이 함께 떠오른 것이었습니다. “너 자신을 알라.” 흥분을 삭히는 데에는 더 없이 좋은 말이었습니다.

그날 밤, 아들과 나는 결국 이차방정식의 근의 공식을 유도하는 것도 다 마치지 못했고, 다음 날 시험을 치르고 온 아들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빠 때문에 수학 완전 망쳤어요.”

세월이 참으로 빠릅니다. 그날의 기억이 오래 묶은 것 같지 않은데 벌써 8년의 시간이 흘렀고, 아들은 얼마 전 입대하여 지금은 훈련소에 있습니다. 오늘 첫 편지가 왔습니다. 생각해보니 아들로부터 받은 첫 편지입니다. 읽고, 또 읽고, 또 다시 읽었습니다. 배가 고픈 것 말고는 견딜만하다는 말에 마음이 놓입니다. 이제 나 역시 아들에게 첫 편지를 쓰려합니다. 긴 편지를 쓰겠지만 “아무리 힘들더라도 요령 피우지 말고 처음부터 하나씩 제대로 배워가거라.”라는 말을 빠뜨릴 수는 없겠는데, 이 또한 아들의 군 생활을 완전 망치게 하는 말일까요?

 

 

<재미있는 식물 이름>

한반도에는 4,500여 종의 식물이 자생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 많은 식물의 이름을 모두 구별하여 아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은 아닙니다. 하지만 그 중에는 생김새가 어떤 형상을 꼭 닮았거나 독특한 생태적 특성이 이름에 배어있어 이름만으로도 식물의 특징을 가늠할 수 있는 것들이 적지 않아 식물과 친해지는데 도움이 됩니다.

먼저 생김새를 따라 이름이 붙은 것들의 예를 들어봅니다. 열매가 맺힌 모습이 꼭 개의 불알처럼 양 갈래로 둥글게 나뉜 개불알꽃, 꽃 모양이 별을 닮은 별꽃, 털이 송송하고 세모난 어린잎의 모습이 꼭 노루의 귀를 닮은 노루귀, 꽃잎이 벌어진 모양이 조개를 연상케 하는 조개나물, 마주 나는 잎이 나비 모양을 닮은 나비나물, 꽃이 핀 모양이 바람개비처럼 생긴 물레나물, 꽃이 지고 맺힌 꼬투리 모양이 쥐꼬리처럼 생긴 쥐꼬리망초, 호랑이의 꼬리처럼 길게 늘어지며 꽃이 피는 범의꼬리, 꽃이 청사초롱처럼 생긴 초롱꽃, 열매가 스님의 깍은 머리와 같은 까마중, 잎을 뒤집어보면 자라의 등처럼 보이는 자라풀, 잎이 톱날처럼 생긴 톱풀, 꽃의 모습이 시집 갈 때 머리에 쓰는 족도리를 빼닮은 족도리풀, 꽃이 맺힌 모습이 붓 모양과 같은 붓꽃, 열매를 보면 다른 것은 떠오르지 않고 오로지 쥐똥만 생각나는 쥐똥나무, 줄기에 화살의 깃처럼 코르크 성분의 날개가 길게 달려있는 화살나무, 꽃이 피어있는 모양이 조로 지은 밥 또는 튀긴 좁쌀을 붙인 것처럼 보이는 조팝나무, 나무에 달린 꽃이 쌀밥을 엄청 확대한 것처럼 보이는 이팝나무 등이 그러한 것들입니다(식물의 이름 중에 ‘팝’은 밥이라는 뜻이고, ‘이팝’은 쌀밥을 뜻합니다).

식물의 특성을 따라 이름이 붙은 것들도 많습니다. 어린 가지의 껍질을 물에 담그면 푸른색이 우러나며 단단하고 질겨 서당 훈장님의 회초리 감으로도 애용되었던 물푸레나무, 잎을 조금 씹어보면 생강처럼 톡 쏘지는 않고 은은하기는 하지만 생강 냄새임에는 틀림없는 생강나무, 가지가 층층으로 일정 간격을 두고 모여 달리며 수평으로 퍼지는 층층나무, 가지를 잘라 가운데 속을 밀어내면 국수 같은 하얀 속 줄기가 빠져나오는 국수나무, 줄기나 단풍든 잎을 태우면 노란빛의 재가 남는 노린재나무, 가을 산에서 가장 먼저 붉어지는 붉나무, 고양이가 몸이 아프면 뜯어 먹는다는 괭이밥, 어린 순을 따먹으면 미쳐버린다는 미치광이풀, 질기고 질겨서 수레바퀴가 지나가도 잘 자란다는 질경이, 잎이나 줄기 어디라도 상처가 나면 아기의 똥과 같은 노란색 유액이 흐르는 애기똥풀, 줄기를 자르면 핏빛의 유액이 나오는 피나물, 쥐 오줌 냄새가 나는 쥐오줌풀, 닭 오줌 냄새가 계뇨등, 노루 오줌 냄새가 나는 노루오줌, 잎을 따서 손바닥에 놓고 탁탁 치면 아주 싱그러운 오이 냄새가 나는 오이풀, 뿌리에서 쓸개처럼 쓴 맛이 나는 쓴풀, 뿌리의 쓴맛이 용의 쓸개 같다는 용담 등이 그 예에 해당합니다.

꽃의 전설에 따라 이름이 지어진 경우도 있습니다. 며느리밥풀꽃은 꽃잎에 밥풀 두 알이 붙어있는 모습을 하고 있는 들꽃입니다. 옛날에 며느리를 지독스레 구박하며 밥조차 굶긴 시어머니가 있었다고 합니다. 어느 날, 그 시어머니는 밥에 뜸이 잘 들었는지 몇 톨 먹어보던 며느리에게 밥을 훔쳐 먹는 도둑으로 누명을 씌워 죽게 만들었는데, 그 무덤에서 밥풀을 입에 문 모습의 꽃이 피어났다는 슬픈 전설과 함께 붙여진 이름입니다. 며느리와 관계된 것으로 며느리밑씻개와 며느리배꼽이 있습니다. 며느리밑씻개는 줄기에 사나운 가시가 많아 도저히 밑씻개로 쓰기에는 불가능할 터인데 며느리가 미운 시어머니는 이 풀로 밑을 씻게 했다는 데에서 붙은 이름입니다. 며느리배꼽은 꽃도 제대로 피지 않고 멍 같은 푸른 열매가 볼품없이 달리는 덩굴식물입니다. 이렇게 미운 모습을 보고 시어머니가 “꼭 우리 며느리 배꼽처럼 생겼네.”라고 한데서 그 이름이 유래했다고 합니다. 안타깝게도 예나 지금이나 고부의 갈등은 어찌할 수 없나 봅니다. 그런가 하면 사위질빵이라는 이름을 가진 식물도 있습니다. 사위질빵은 줄기가 약해서 잘 부러지는 덩굴인데, 사위에게 짐을 지울 때는 그 약한 넝쿨로 질빵을 매서 짐을 지게 하였다니 사위를 끔찍이 아끼는 장모의 사랑 역시 예나 지금이나 다름이 없음을 알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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