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과 나 숲 곁에서

초등학교 시절에는 방학만 되면 외가댁으로 갔다가 개학 전날에야 올라왔었습니다. 단칸방 생활, 작은 입 하나라도 줄여야 했던 어머니의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는 것은 조금 나중에 안 일입니다. 외가댁에 가는 길이 지금은 서해대교가 바다까지 가로질러 멀다 할 수 없지만 그 시절의 어린 나에게는 까마득히 먼 길이었습니다. 교통편은 기차였는데 서울에서 장항에 이르는 장항선은 언제나 발 디딜 틈마저 없을 정도로 붐볐습니다. 사람의 물결에 떠밀려 입구로 얌전히 걸어 올라간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방법은 하나였습니다. 큰외삼촌께서 먼저 기차에 오르시면 어머니는 나를 들어 올려 창문으로 간신히 밀어 넣는 방법이었습니다. 그러고 보면 그 즈음 나의 몸이 작고 허약했던 것은 참으로 다행스런 일이었습니다.

웃고 계신 것인지, 울고 계신 것인지 잘 구분할 수 없었던 어머니의 표정을 남겨두고 움직이기 시작한 기차는 조금 가다 서고, 다시 조금 움직인다 싶으면 쉬는 과정을 수없이 반복했습니다. 도착할 때까지 도대체 몇 번을 쉬는 것인지는 세다 지치고 또 졸음으로 지나쳐 제대로 헤아려 본 적이 없습니다. 설렘과 지루함이 뒤섞인 시간이 흘러 마침내 신례원역에 기차가 닿아 내려도 그리 반갑지는 않았습니다. 언제나 뽀얀 먼지를 뒤집어쓰고 나타났던 버스를 타는 순간부터가 진짜 먼 여행의 시작이었으니 말입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파란 하늘이 노랗게 변하기 시작하며 속이 울렁거리기 시작했습니다. 아무리 이를 꽉 물어도 오히려 이마에 땀방울만 맺힐 뿐 역류하는 음식물의 힘은 어찌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기를 몇 번, 어떤 때는 목적지에 다 이르지 못하고 중간에서 내려야 했던 적도 있었습니다. 언제 또 올지 모르는 버스를 마냥 기다려야 했음에도 그저 측은히 바라봐주던 큰외삼촌의 눈빛에 나는 그저 못난 내가 밉기만 했습니다. 쪽주머리라는 곳에서 버스가 멈추면 한 시간 가까이 또 걸어야 했으나 죽을 것만 같았던 멀미에서 벗어나 흙냄새와 풀냄새를 맡는 것으로도 행복하여 걷는 것은 아무런 문제가 없었습니다.

야트막한 산 서너 개를 넘어서면 탁 트인 평지가 펼쳐졌고, 그 드넓은 논 가운데 한 채 있는 집이 바로 외가댁이었습니다. 산모퉁이를 돌아서서 몇 발짝 지나면 아직도 거리는 아득히 남아 있는데 벌써 외가댁 마당으로는 나를 맞이하기 위한 행렬이 보였습니다. 아마도 외할머니께서는 아침부터 안방 쪽문에 구멍을 내고 붙여놓은 유리를 통해 내가 올 길을 바라보고 계셨을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서 매번 산모퉁이를 돌아 조금 지날 때마다 정확히 마중을 나오실 수는 없었습니다. 외할머니만 마중을 나오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외할아버지께서는 항상 앞마당에 그대로 서계셨지만, 맨 앞에 서셔서 달려오듯 빠른 걸음으로 둑길을 따라 오셨던 외할머니의 뒤를 이어 둘째, 셋째, 막내 외삼촌, 큰 외숙모, 작은 외숙모, 이모, 외사촌 형, 외사촌 동생들 정말 대식구가 마중을 나왔었습니다. 잘난 것이 아무 것도 없었고 그래서 누구에게서도 환대를 받지 못했던 시절이었기에 그 순간만큼은 정말 대단한 아이가 되어 있는 느낌이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정겨운 만남 속에서 어린 가슴에도 따듯한 사람의 정이 조금씩 쌓이게 된 것 같습니다.

시골에서의 생활은 모든 것이 재미있고 신기했습니다. 무엇보다 자연과 그 안에 깃들인 온갖 생명체들과 자연스럽게 친구가 된 것은 정말 고마운 일이었습니다. 그러한 시간이 없었더라면 아마 아직까지도 이 세상은 인간만이 사는 곳이라고 착각하며 살고 있기가 쉽습니다. 더군다나 결과만을 보게 되는 도시의 생활과 달리 어떤 결과의 과정을 처음부터 끝까지 직접 경험할 수 있었던 것은 소중한 교훈이었습니다. 그러한 경험이 나의 삶에서 빠졌더라면 많은 손이 가고 그 보다 더 많은 정성이 들어가지 않고서는 무엇 하나 완성되는 것이 없다는 지극히 평범한 사실마저 평생 깨닫지 못하고 살았거나, 깨달았다 하여도 그리 되기까지 상당히 오랜 시간이 걸렸을 것이 틀림없습니다. 그리고 자연의 모든 요소는 어떠한 형태로든 쓸모가 있어 함부로 버려져 영원히 쌓이는 일이 없음을 지켜보게 된 것은 훗날 자연과 어떻게 더불어 사는 것이 옳은 가에 대하여 깊이 생각하는데 좋은 밑거름이 되었습니다. 탈곡이 끝난 볏짚은 잘 말린 다음 적당한 크기의 다발로 묶어 차곡차곡 쌓아 집모양의 짚누리의 형태로 보관하다 필요에 따라 조금씩 헐어 썼습니다. 볏짚은 가장 중요한 땔감이었고, 초가집 지붕을 엮는 소재가 되었으며, 새끼줄과 쌀가마니를 만드는 재료였고, 작두로 잘게 썬 여물을 쌀겨와 섞어 가마솥에 끓이면 소의 훌륭한 겨울철 양식이 되었습니다. 볏짚, 왕겨, 콩대, 장작 그 무엇이라도 불을 지피고 남은 모든 재는 헛간에 잠시 모여져 있다가 가축들의 배설물과 만나 좋은 거름으로 변했습니다. 음식물 찌꺼기 역시 잘 가려서 돼지나 닭에게 주었고, 그도 마땅치 않은 것은 퇴비더미로 보내져 역시 한 해의 농사로 지친 땅을 다독이는데 쓰였습니다.

어느 해인가 주황색의 플라스틱 바가지가 박을 타서 만든 바가지를 대신하고, 나일론 줄이 새끼줄의 자리를 빼앗으면서 시골에도 쌓이는 것이 생기기 시작한 즈음 나에게도 변화가 있었습니다. 방학이라 하여 내내 시골에서 지내지를 못하게 된 것입니다. 중학교에 들어가면서는 잠시 들를 뿐이었고, 고등학교부터는 아예 가지를 못했습니다. 나의 몸이 그 곳에 머물 수 없게 되면서 더 더욱 내 마음 속에는 강과 산과 들, 그리고 그 안에 깃들인 생명체에 대한 그리움이 깊이 자리 잡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대학에서 생물학을 공부하게 된 것은 지극히 자연스런 선택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1991년, 식물생리학 전공으로 박사학위를 받으면서 지금 근무하는 대학에 부임하게 되었습니다. 우리 대학이 개교를 한 해였습니다. 모든 것이 처음일 수밖에 없는 신설 대학이니 나의 애씀으로 원하는 것을 하나씩 채워갈 수 있다는 것은 상상만으로도 가슴이 벅차오르는 기쁨이었습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현실은 그 기쁨의 딱 절반을 가슴에서 도려내라 했습니다. 그 때 나이 겨우 서른이었습니다.

순수과학을 연구하는 사람의 꿈은 크게 다르지 않으리라 생각합니다. 관심분야가 같은 몇 명의 학생이 있고, 그들과 함께 밤을 지새우며 연구를 하여 일 년에 한두 편 논문을 발표하는 일입니다. 그러나 그 소박한 꿈마저 시작조차 하지 못한 채 그대로 꺾어야 했습니다. 모든 것이 나의 게으름에서 비롯했음은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신설 대학에서 고가의 분석 장비들을 짧은 시간에 마련하기 어려웠고, 학생이라고는 이제 대학에 갓 들어온 신입생이 전부였습니다. 더군다나 자고 눈을 뜨면 새로운 정보가 쏟아지는 학문의 특성도 한 몫을 했습니다.

그렇다고 그대로 주저앉을 수는 없었습니다. 곁에 있는 지리산이 품고 있는 생명에 눈을 돌리기 시작했습니다. 나의 발로 온힘을 다하여 움직여 자연에 깃든 다양한 생명체를 직접 만나서 글과 사진으로 기록하는 일을 새로운 꿈으로 삼은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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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박꽃나무/ 갈겨니/ 하늘다람쥐/ 아시아실잠자리/ 달걀버섯/ 청개구리/ 배풍등/ 갈대

산에는 좋은 벗들이 많았습니다. 기꺼이 제 자리만 지키면서도 철을 따라 몰려오는 세상살이의 어려움을 잘도 견뎌내는 야생화가 있었고, 이렇게 사는 것이 옳다는 듯 당당하고 떳떳하게 서있는 나무가 있었습니다. 다양한 형태와 빛깔의 멋진 버섯은 낮은 땅과 높은 나무를 오가며 펴있었고, 꽃과 나무와 버섯 사이를 분주히 스며드는 크고 작은 곤충이 있었습니다. 아주 조심스럽게 조금 더 다가서면 계곡과 그 주변에서는 양서류와 파충류를 만날 기회도 틀림없이 맞을 수 있었습니다. 무척 긴 기다림과 외로움을 감당해야 하지만 자연의 모습에 가깝게 적절히 몸을 감추고 버티다 보면 몸집이 큰 산짐승의 맑은 눈을 가까운 거리에서 만날 때도 있었습니다. 게다가 같은 곳으로의 산행이 어느 정도 쌓이면 그 안에 깃든 모든 생명들이 수상쩍은 눈빛을 멈추고 슬쩍슬쩍 말을 걸어오기도 하니 산은 내 곁에 있는 참으로 귀한 벗의 일부였습니다.

시간이 있으면, 없으면 어떻게든 만들어서라도 우리의 산과 들과 강이 품고 있는 생명체들을 10년이 넘도록 쉼 없이 만났으나 어김없이 돌아오는 겨울이 나에게는 무척 긴 시간이었습니다. 겨울에도 여전히, 아니 오히려 더 많이 만날 수 있는 생명체가 새인 것은 알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 세계에까지 기웃거리면 그나마 조신하게 보냈던 겨울마저 어찌 지내게 될지 불을 보듯 하여 차마 들어서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마흔 셋이 되던 해의 첫날, 살아 온 날들보다 살아야 할 날이 더 짧기가 쉽다는 생각과 함께 새의 세계에 들어서기로 마음을 정해버리고 말았습니다. 더 이상 봄만 기다리며 기나 긴 겨울을 보낼 수는 없었습니다.

마침내 계절을 가리지 않고 일 년 내내 자연 속에서 생활하는 시간이 몇 년 더 흐른 2007년 어느 봄날, 지리산 자락을 더듬다 내 삶의 모습을 또 다시 완전히 바꿔놓은 친구와 인연이 닿게 됩니다. 큰오색딱따구리라는 새였습니다. 큰오색딱따구리 한 쌍은 새끼를 키워낼 둥지를 막 짓기 시작하던 터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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둥지를 짓고 있는 큰오색딱따구리 아빠 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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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오색딱따구리 가족

 

큰오색딱따구리가 둥지를 완성하고, 알을 낳아 품고, 먹이를 날라 새끼를 키워내는 과정 전체를 관찰하기로 마음먹은 것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었습니다. 우선 우리나라의 경우 큰오색딱따구리는 물론 새의 번식일정 전체를 빠짐없이 살펴본 사례가 없었습니다. 물론 새의 번식과정에 대해 방송사에서 제작한 다큐멘터리는 있지만 전체 과정을 지켜보는 것이 아니고 특정 시기를 띄엄띄엄 촬영하여 이어붙인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지키고 싶은 약속도 있었습니다. 생명과학 연구의 출발은 관찰이며, 관찰은 대상에게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다 던져 바치는 과정이라고 항상 가르쳤고, 그것은 나와의 약속이기도 하였으니 스스로 부끄럽지 않을 기회가 될 수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것저것 기웃거리며 조각난 정보를 얻는 것에 조금 지쳐있었기에 하나를 보더라도 ‘처음부터 끝까지 모두 다’로 방향을 바꾸고 싶었던 때였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이유만으로는 산 속에 홀로 틀어박혀 제대로 자지도 못하고 먹지도 못하며 하루 종일 둥지 하나만 바라보는 험난한 여정을 버텨내지 못했을 것입니다. 큰오색딱따구리와 함께 하는 시간이 조금씩 쌓이며 인간적 욕심은 자연스럽게 애정으로 바뀌었고, 저들이 보여줄 모습에 대한 설렘과 기다림 속에 하루하루가 흐르다보니 마침내 50일까지 이르게 되었습니다. 50일 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그들과 함께 하면서 내 삶은 완전히 다른 모습으로 변했습니다. 그리고 내 삶의 방향도 예전에는 상상조차 못했던 ‘새와 동행하는 삶’으로 바뀌고 말았습니다. 나이 마흔의 중반도 넘어 새로운 세계로 인생의 방향을 송두리째 바꾸기가 쉬운 일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주저할 이유는 없었습니다. 그들이 분명하게 남기고 떠난 것이 있었기에 그렇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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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은 그 무엇이라도 이미 그 자체로 더 이상 아름다울 수 없는 것이라 여기며 살았습니다. 그러나 그 하나의 생명으로부터 다시 그를 닮은 새 생명이 온전히 완성되기까지 있어야 하는 간절함에 대해서는 제대로 알지 못했습니다. 그것은 지금까지 막연하게 생각했던 경이로움과는 또 다른 것이었습니다. 큰오색딱따구리 한 쌍이 새끼를 키워내는 과정을 지켜보며 나는 많이 부끄러웠습니다. 큰오색딱따구리 부모 새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어린 새들에게 다 주고 있었습니다. 아무 것도 되돌아오는 것이 없었음에도 때로는 자신의 생명을 버려야 하는 위협 앞에서 조차 전혀 머뭇거리지 않는 것도 보았습니다. 이 모든 것이 이미 유전자에 짜여있는 본능이라고 한다면 더 이상 할 말이 없습니다. 하지만 나는 그리 믿지 않기로 했습니다. 그들은 적어도 사랑이라는 것이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지에 대해서만큼은 분명히 알게 해 주었기 때문입니다.

큰오색딱따구리 어린 새 둘째마저 둥지를 떠나 마침내 둥지가 비던 날 많이 울었습니다. 부모의 사랑을 제대로 알지 못하고 살았던 것과 아비로서 해야 할 일을 온전히 하지 못하고 있는 것에 대한 죄송함과 미안함의 눈물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떠나 다시 오지 않았어도 나는 그 빈 둥지를 완전히 떠날 수 없었습니다. 그렇게 서성거리기를 몇 달이 지났을 때 큰오색딱따구리의 둥지가 말벌의 둥지로 바뀌는 것을 보았습니다. 우리의 모습과 다르게 자연에서는 그 어느 것도 허투루 버려지지 않고 온전히 다시 쓰이는 것을 직접 눈으로 확인한 것이었으며, 초등학교 시절 외가댁에서 보았던 모습이 하나씩 가슴에 새롭게 떠오르기도 했습니다. 그 이후로는 딱따구리의 둥지만 찾아 다녔고, 그를 통해 번식을 마치고 비어 있는 딱따구리의 둥지는 나무를 파낼 능력이 없는 다른 많은 생명체에게 더 없이 귀한 선물이 된다는 것도 하나 씩 알게 되었습니다.

해가 바뀌어 지리산 기슭에 다시 번식의 계절이 돌아왔을 때, 이번에는 조금 무모한 도전을 했습니다. 딱따구리의 옛 둥지를 있는 그대로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제 몸에 맞게 다시 꾸며서 번식을 하는 동고비의 번식일정에 동행하기로 마음을 먹은 것이었습니다. 강의로 인해 관찰에 더러 빈 시간이 생기는 것이 아쉬워 이번에는 아예 휴직까지 하면서 관찰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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딱따구리의 옛 둥지에 진흙을 발라 제 몸만 빠듯히 드나들게 입구를 좁힌 동고비

관찰의 대상을 동고비로 정하기까지 마음이 조금 복잡하기는 했습니다. 동고비는 외형으로 암수를 구분할 수 없다는 것이 가장 큰 이유였습니다. 번식일정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암컷과 수컷의 역할인데, 암수의 구분조차 어려우니 쉽게 마음을 정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게다가 동고비는 작고 동작마저 상당히 빠른 새입니다. 눈과 카메라가 제대로 따라가 줄지도 염려스러웠습니다. 하지만 하나 씩 추리하고 확인해가는 것도 새로운 도전일 수 있겠다 싶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딱따구리가 번식을 마친 둥지가 그냥 버려지는 것이 아니라 동고비가 리모델링을 통해 새롭게 단장을 하여 번식을 치르는 과정은 꼭 보고 닮아 따르고 싶은 자연의 모습이었습니다.

동고비 한 쌍은 80일에 걸쳐 8마리의 어린 새를 키우는 모든 과정을 고스란히 보여주고 떠났지만 나는 그 기록을 잠시 내 속에만 담아두어야 했습니다. 아직 어두움이 걷히지 않은 시간부터 다시 어두움이 내린 지 한참이 지난 시간에도 나는 분명 숲에 있습니다. 그렇게 80일을 온전히 저들과 동행하며 둥지 곁에서 직접 지켜본 기록임에는 틀림없었습니다. 하지만 암수의 구분이 분명하지 않은 상황에서 많은 것을 추리해야 했기에 오류의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었습니다. 한 해를 더 기다려 동고비를 다시 만났습니다. 이미 학교로 돌아 와 강의를 하며 관찰을 한 것이라 군데군데 빠진 시간이 있었지만, 첫 번째 기록에 대한 확신을 갖기에는 충분하다 싶어 동고비 이야기를 세상에 내놓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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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년에 걸쳐 동고비를 만나고 반년은 꼼짝없이 그 내용을 정리한 책이 세상에 나왔지만 나는 그 반가운 책을 강원도의 한 은사시나무 숲에서 받아보았습니다. 벌써 몇 달 째 집까지 떠나서 까막딱따구리의 번식일정에 동행하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강원도의 한 은사시나무 숲은 까막딱따구리를 만나기 위해 머문 것이었으나 그 숲은 까막딱따구리만 사는 숲이 아니었습니다. 청딱따구리, 큰오색딱따구리, 오색딱따구리, 쇠딱따구리를 포함한 우리나라의 딱따구리가 모두 모여 사는 딱따구리의 천국이었습니다. 온 산을 더듬듯 다니며 온 종일 발품을 팔아도 딱따구리의 둥지 하나 찾는 것이 쉽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딱따구리가 둥지를 짓는 습성을 익히 알고 찾아다녀도 그렇습니다. 그런데 한 자리에 서서 우리나라에 깃들인 모든 종류의 딱따구리를 한꺼번에 만날 수 있었으니 그 숲은 분명 기적의 숲이었습니다.

게다가 그 은사시나무 숲의 축복은 딱따구리의 천국으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딱따구리의 둥지는 분명 딱따구리가 지은 둥지이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딱따구리만 사용하는 둥지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딱따구리는 나무에 구멍을 파고 아래쪽으로 파내려가 나무속에 빈 공간을 만드는 방식으로 둥지를 짓습니다. 따라서 딱따구리의 둥지는 모진 비바람과 눈보라를 막아주는 아늑함은 기본이고, 천적을 방어하는 데에도 최고인 완벽한 둥지인 셈입니다. 그러니 숲에 기대어 사는 다양한 생명체들이 이처럼 귀한 보금자리를 탐내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우선, 나무에 구멍을 뚫고 파내서 둥지를 지을 능력이 없는 많은 새들이 속속 숲에 모여들기 시작했습니다. 박새, 쇠박새, 진박새, 곤줄박이, 동고비와 같은 작은 크기의 새들로부터 파랑새, 호반새, 소쩍새와 같은 중간 크기의 새를 비롯하여 큰소쩍새와 원앙과 같이 몸집이 큰 새들도 딱따구리의 둥지를 기웃거렸습니다. 딱따구리는 종류에 따라 몸의 크기가 상당히 차이가 나며, 몸의 크기에 따라 둥지의 규모도 다르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또한, 다람쥐와 하늘다람쥐도 이처럼 좋은 기회의 땅을 놓치지 않았습니다.

이 과정에서 둥지의 주인인 딱따구리와 딱따구리의 둥지에 입주하기를 희망하는 다른 친구들 사이에는 다툼이 끊이지 않았습니다. 그렇다고 딱따구리가 하루 종일 둥지만 지키고 있을 수도 없는 노릇이어서 딱따구리는 아예 새로운 둥지를 다시 만드는 경우가 많아졌습니다. 이러한 일이 반복되며 은사시나무 숲은 딱따구리의 천국에서 다양한 생명체의 천국으로 바뀌게 되었습니다.

생명이 있는 것에 더 귀함과 덜 귀함이 있을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생명의 존귀함과는 별도로 생물종 자체의 희소성, 고유성, 특이성, 학술적 가치 등을 고려하여 지정하고 보호하자는 것이 천연기념물입니다. 은사시나무 숲은 까막딱따구리, 원앙, 소쩍새, 큰소쩍새, 하늘다람쥐를 포함한 5종의 천연기념물이 이웃하여 살아가는 아주 특별한 숲이기도 했으니 강원도의 한 은사시나무 숲과 인연이 닿은 것은 나의 삶 속에서 만난 가장 큰 행운이라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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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오색딱따구리를 만난 것은 15년 가까이 지리산과 섬진강에서 만난 친구들의 이야기를 책으로 엮어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 그동안의 글들을 정리하던 즈음이었습니다. 원고의 마무리는 잠시 그대로 펼쳐둔 채 큰오색딱따구리 부부가 어린 새를 키워내는 일정 전체에 동행하게 된 것이었는데, 그 이후로도 우리나라의 딱따구리만 찾아다니는 생활에 호되게 미치다 보니 전공과는 아주 거리가 먼 새에 관한 세 권의 책들이 먼저 세상과 만나게 되었습니다.

잠시 접어두기로 마음먹었던 원고가 넷째로 밀려나 얼마 전 마무리되었습니다. 첫째가 되었을 책이 넷째로 미뤄지면서 DMZ의 생명을 포함하여 조금 더 다양한 친구들의 이야기를 들려드릴 수 있게 된 것은 다행이다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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삵/ 고라니/ 두루미/ 멧돼지/ 점박이물범/ 산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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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의 삶이 어떠한 모습으로 어디를 향해 갈 것인가 하는 것은 살며 언제 누구를 만나느냐에 달려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누구라는 것이 꼭 사람이 아닐 수도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나의 경우, 그 누군가가 넓게는 자연이었으며 좁게는 새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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