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앗의 생명여행 자연 속의 단상

잠자리의 날개가 윤기를 잃은 지 오래입니다. 이제는 고단한 날개를 접고 군데군데 깊게 찢겨나간 갈대 끄트머리에 앉아 한참을 그대로 있는 것을 보니 가을은 가을인가 봅니다. 가을이어도 먼 산을 가까이 데려와줄 만큼의 깨끗한 하늘을 만나는 것이 쉽지 않은데 지난 밤 비바람이 하늘에 뿌옇게 낀 것들을 말끔히 쓸어냈습니다. 햇살도 곱고 알맞게 선선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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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란띠좀잠자리

 

조금 걷고 싶은 마음이 샘솟아 보던 책은 그대로 펼쳐두고 연구실 문을 열고나섭니다. 아스팔트로 포장된 산책로를 따라 걷다 방향을 바꿔 숲길로 들어섭니다. 숲길을 거닐 복장까지 갖추고 나온 것은 아니어서 조금 망설이게 되지만 큰 문제가 될 것은 없습니다.

지금 걷는 숲길은 나의 발길이 만든 길입니다. 동행이 있더라도 나란히 걸을 여유가 없어 누군가는 앞서야 하고 누군가는 뒤따라야 하는 좁은 소나무 숲길입니다. 나는 이 길을 ‘솔바람 길’이라 부릅니다. 상큼한 바람이 너무 빠르지도 너무 느리지도 않게 소나무 사이를 흘러 다니고 있습니다. 시원스럽게 솟은 소나무 아래에 두런두런 서 있는 키 작은 나무들은 제 잎을 다양한 빛깔로 물들여가며 정중히 가을을 맞고 있습니다. 가을 산에서 가장 먼저 붉어진다는 붉나무는 이미 진한 붉은 색으로 몸단장을 마친 상태이며, 붉은 색으로 잘 익은 열매들도 자주 눈에 띕니다. 오랜만에 찾은 길이고 다니는 사람도 없었을 것이기에 길까지 풀들이 세력을 뻗혀 때로 허리 높이의 풀길을 지나야 할 때가 많습니다. 하지만 원래가 저들의 땅이었으니 조금의 불편함은 감수해야 합니다. 조금의 불편함이란 옷에 달라붙는 열매가 많음을 말합니다.

자연에 깃든 생명체들의 생물학적 존재 이유는 번식이며, 번식은 선택이 아니라 당위입니다. 생물이 번식이라는 과업을 성공적으로 달성하기 위하여 짜내는 묘책은 정말 대단합니다. 그 중에서도 더군다나 공간 이동을 할 수 없는 식물이 어떻게든 씨를 퍼뜨리려는 몸부림을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으면 숙연해지기까지 합니다.

식물이 씨를 만들고 그 씨를 자신의 발밑에만 떨어뜨린다면 그것은 씨가 싹을 틔워 생장하기를 바라지 않는다는 것과 같습니다. 식물에 있어서 어미의 품은 아늑하고 안전한 곳이 아닙니다. 어미 식물의 발아래 떨어진 씨는 발아와 생장에 꼭 필요한 물, 햇빛, 그리고 영양분을 어미 식물에 빼앗겨 씨의 상태를 벗어나 온전한 식물로 거듭날 수가 없습니다. 어미 식물 또한 이러한 이치를 너무도 잘 알고 있기에 씨나 열매가 자신을 떠나 더 좋은 환경을 찾아 가능한 멀리 퍼질 수 있는 산포방법을 끝없이 모색하며 오랜 진화의 길을 걸어왔습니다.

효율적인 산포를 위해 바람을 이용하는 식물이 있습니다. 모든 난초과 식물의 씨는 먼지처럼 아주 작습니다. 바람에 쉽게 날려 퍼지겠다는 뜻입니다. 바람을 이용해 산포할 경우 바람에 잘 날릴 수 있도록 적극적으로 보조 장치를 두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씨 또는 열매에 깃털이나 날개를 다는 방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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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주가리/ 솜나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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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단풍

 

식물은 물의 흐름을 통해 씨나 열매를 먼 곳으로 퍼뜨리기도 합니다. 물의 흐름을 이용하여 산포되는 열매는 크고 무거운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물의 흐름을 이용하려 했을 것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물에 가라앉아서는 멀리 이동할 수 없으므로 구조적으로 부력이 크도록 고안되어 있습니다. 또한 물에 오랜 시간 있어야 하므로 부패에 대한 저항력도 갖추고 있습니다. 비 또한 흐르는 물과 다르지 않기 때문에 열매와 씨를 산포하는 수단으로 이용되기도 합니다.

누구의 도움을 받지 않고 스스로 강력한 분사방법으로 산포하는 식물 또한 많으며 이러한 자가산포 기작의 배경은 팽압입니다. 대중가요 중에 ‘손대면 톡하고 터질 것만 같은 그대 봉선화라 부르리’라는 노랫말로 시작하는 노래가 있습니다. 높은 팽압에 의해 강한 장력 상태를 유지하고 있는 성숙한 봉선화의 열매는 손대면 톡하고 터질 것만 같은 것이 아니라 실제로 톡하고 터지며, 터지는 순간 씨는 2미터 정도까지 멀리 튕겨져 나갑니다. 물론 손을 대지 않더라도 때가 차면 스스로 터집니다. 2미터로 무엇이 달라지냐고 할 수 있지만 그 거리가 봉선화에게는 간절한 소망의 거리입니다.

씨나 열매가 가장 확실하게 어미 식물을 떠나 산포할 수 있는 방법은 동물을 이용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수많은 속씨식물의 열매와 씨는 동물의 털이나 깃털에 붙어서 운반됩니다. 이러한 열매와 씨는 갈고리, 낚시 바늘, 가시, 털 등의 여러 모양으로 동물의 몸에 잘 달라붙을 수 있는 구조를 마련하고 있습니다. 또한 끈끈한 점성물질을 분비하여 동물에 달라붙어 자신의 힘으로는 도저히 옮길 수 없는 먼 거리를 옮겨가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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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깨비바늘

 

살신성인의 방법도 있습니다. 동물에게 아예 먹히는 것으로 식물이 가장 많이 사용하는 방법입니다. 덜 익은 열매는 흔히 푸른색이어서 식물의 잎 색깔과 비슷하기 때문에 새와 포유류를 비롯한 척추동물의 눈에 잘 띄지 않습니다. 또한 이런 미성숙 열매들은 주로 떫거나, 쓰거나, 신맛이 나며 단단하기까지 하여 동물들이 잘 먹을 수 없습니다. 열매가 익지 않았다는 것은 그 안에 있는 씨 또한 제대로 영글지 않아 산포될 준비가 되지 않았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식물은 자신의 열매가 익기 전에 동물에게 먹히는 것을 이런 식으로 피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열매가 익으며 그 안에 있는 씨도 산포될 준비를 마치면 열매는 변신을 합니다. 색깔이 붉은 색으로 변하고 육질이 부드러워지며 당도 또한 높아집니다. 이제는 오히려 동물이 자신의 열매를 먹어주기를 바라는 신호를 보내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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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풍등

 

솔바람 길의 갈림길에 이르렀습니다. 올라왔으니 내려가야 하는데 길은 세 갈래입니다. 잠시 나선 산책이 길어졌으니 샛길을 따라 내려가기로 합니다. 다시 아스팔트로 포장된 길이 보일 즈음 잠시 걸음을 멈춥니다. 숲에 두고 와야 할 친구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온 몸에 다닥다닥 붙어있는 열매들입니다. 숲길을 지나며 만났던 야생화의 목록이 옷에 기록되어 있는 셈입니다.

발목 근처에는 끈끈한 점성을 가진 주름조개풀의 열매가 알차게 붙어 있습니다. 옷깃만 스쳐도 인연이고 보면 오늘 인연이 닿은 친구 중 가장 키가 작은 것은 주름조개풀이었다는 뜻입니다. 그 다음 키의 주인공은 짚신나물입니다. 무릎 쪽으로 끈끈한 짚신나물의 열매가 우르르 몰려 있으니 말입니다. 무릎과 허리 사이에는 가는도깨비바늘이라고도 불리는 까치발의 열매가 박혀있습니다. 허리 쪽으로는 쇠무릅과 도둑놈의갈고리가 붙어있습니다. 허리에서 가슴 높이로는 멸가치의 곤봉 모양으로 생긴 끈적끈적한 열매와 한 번 박히면 잘 빠지지 않도록 바늘에 미늘까지 갖춘 도깨비바늘이 꽂혀 있습니다. 숲 속을 이동하는 동물의 키 또한 다 다를 텐데 그에 맞춰 열매를 맺는 높이를 서로 달리하고 있는 것이 신기하기만 합니다.

식물에게 가을은 맺음의 시간인 동시에 버림과 떠나보냄의 시간이기도 합니다. 제 몸에 꼭 붙들고 있던 잎을 미련 없이 버리며, 그렇게 애써 맺은 열매조차 망설이지 않고 떠나보냅니다. 그리 하지 않고서는 매서운 겨울을 이겨낼 수도 없고 종 자체도 지켜낼 수 없다는 것을 저들은 잘 알고 있습니다. 따라서 버림과 떠나보냄은 상실의 체념이 아니라 새로운 생명의 탄생을 위한 소망의 여행인 것입니다.

옷에 촘촘히 붙어있는 열매를 하나씩 떼어내 숲에 내려놓으며 생각해봅니다. 나는 이 가을을 맞아 복잡한 내 가슴에서 무엇을 버려야할지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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