떳떳한 남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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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네가 아빠다. 네가 남편이다. 네가 아들이고 사위다.”

 육아휴직을 했다는 사실을 SNS에 알리자 한 대학 친구가 남긴 댓글이다. 기분이 제법 좋아지는 격려였다. 아이와 아내, 어머니와 장모님께 떳떳한 남자로 인정받은 느낌이었다.
 
 어머니 세대의 여성들, 그중에서도 특히 가사에만 전념해온 분들을 생각하면, 자식 된 도리로 참 면목이 없다. 실컷 고생하며 키워서 시집 장가보내놓고 이제 좀 쉬어볼까 했는데, 애 낳더니 좀 봐달라며 불쑥 들이밀기 일쑤다. 물론 손자·손녀는 예쁘기 그지없지만, 예뻐하는 것과 키우는 건 다른 일이다. 어머니들 마음을 미뤄보건대, 놀러 오면 반갑고 왔다 가면 더 반가울 게 분명하다.
 
 언젠가 두 살배기 딸의 엄마인 회사 동료가 “우리 엄마가 애 못 봐주시겠다 해서, 신랑하고 엄마하고 사이가 나빠질 뻔했다”고 털어놓은 적이 있다. 실제 그렇게 장모-사위 관계가 틀어진 경우가 꽤 된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이거 괜찮은 건가? 아이를 돌볼 의무는 부모의 몫이고, 할머니들에겐 선택사항 아닌가? 냉정하게 말하면 할머니들에겐 아이를 돌봐주지 않아도 되는 권리도 있다. 기껍기까지 바라는 것은 지나친 일이다. ‘어차피 집에만 계신데’라고 여기기 쉽지만, 그 일상의 내용이 무엇이었든, 그걸 하찮다고 여기는 세상 사람이 얼마가 됐든, 그걸 관두고 애 봐달라고 요구할 자식의 권리가 언제부터 생겼다는 말인가.
 
 딴은 그랬다. 양가 상황도 좋지 않았고 다른 곳에 맡길 엄두도 나지 않았다. 용기를 내어 육아휴직에 나섰고, 주위의 힘을 빌지 않고 아이를 키워보기로 했다. 하지만 힘든 육아의 날이 더해 갈수록 분명해지는 사실이 있었다. 나는 내 아이를 누구보다 사랑하는 아빠라고 자부하지만, 그렇다고 이 아이를 내 손으로 키우지 못해 환장한 아빠는 아니라는 점이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것 같은 자식이라 해도, 실제 눈에 넣으면 아프다는 사실을 깨달은 게다.
 
 여건만 된다면 우리도 육아 도우미와 가사 도우미를 고용해도 될 것이었다. 도우미들이 힘들지 않게 둘씩 두어도 좋을 것이었다. 아내에겐 다달이 용돈을 두둑이 쥐여주며 “회사 다니기 힘들지. 언제든지 가기 싫으면, 스트레스 받지 말고 얘기해”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었다. 둘째나 셋째를 낳는 것도 훨씬 부담이 덜할 터였다. 아이를 위해 부모가 줄 수 있는 가장 큰 선물이 ‘동생’이라는 것, 우리도 모르지 않기 때문이다.
 
 현실은 그렇지 못했다. 나는 <제빵왕 김탁구>의 재벌2세 구마준도 아니고, <시크릿가든>의 재벌2세 김주원도 아니고, <최고의 사랑>의 톱스타 독고진도 아니었다. 아내와 내가 번갈아 경제 활동을 쉬면서 가계의 수입은 반 토막이 났는데, 분유 값과 기저귀 값 덕에 지출은 부쩍 늘었다. 도우미를 고용하거나 둘째를 고민할 여유가 생기기는커녕, 통장 보며 계산기를 두드리다 보면 한숨이 절로 날 뿐이었다. 그 생각을 할 때면, 정녕 간절히 부자이고 싶었다.
 
 ‘아빠의 육아’를 보는 어른들의 시선마저 곱지만은 않았다. 우리는 양가에 손 벌리지 않았다며 만족했고, 어른들도 다행스럽고 고맙게 여기셨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론, “우리 아들(또는 사위)이 한창 일해야 할 나이에 집에서 애를 보고 있다”는 안타까움이 불만 섞인 한숨 사이로 이따금 새어나왔다. 아내는 아내대로 ‘집에서 애 보는 엄마들도 많은데 내가 괜히 회사 다니겠다고 나섰나?’하며 고민했고, 나는 나대로 ‘내가 능력이 없어서 아내 고생시키고 나도 고생하는구나’라고 탄식했다.
 
 해결책을 찾아내지 못한 채 부부는 머리를 긁지만, 아이는 그저 무럭무럭 자란다. 그리고 언젠가는 어린이집에 보내도 좋을 때가 되고, 유치원, 학교에도 보내게 될 것이다. 그때가 되면 지금 이렇게 함께할 수 있었던 시절을 그리워하게 되지나 않을지. 그렇게 생각하니 아이와 함께하는 시간엔 불필요한 고민을 하기보단, 차라리 열심히 놀아주자는 생각을 하게 된다. 떳떳한 남자의 카르페디엠.
 
** 이 글은 육아휴직중이던 시절에 작성해 디자인하우스 간행 월간 육아잡지 <맘&앙팡> 2011년 8월호에 실린 기고문을 약간 가필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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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ofile아이 둘의 아빠인 <한겨레> 정치부 기자. 21세기 인류에게 육아는 남녀 공통의 과제라고 믿는다. 육아휴직 등으로 나름 노력해봤지만 역시 혼자 가능한 일은 아니며, 사회적 인식의 전환이 필요하다는 걸 어렴풋하나마 알게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