겪지 않아도 될 일, 겪어야만 하는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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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전의 여왕>(MBC, 2010.10.~2011.2.)이란 방송 드라마가 있었다. 잘 나가던 30대 초반 커리어우먼이 직장 후배와 결혼하면서 원치않는 퇴사를 하게 된다는 설정이 시작이다. 5년 뒤 이 여성이 회사로 돌아와 승승장구하게 되고, 비록 파경의 비극을 겪지만 새로운 사랑에서 ‘역전’을 거둔다는 줄거리다.
첫 아이 출산 뒤 일을 그만두고 집에서 아이를 보던 아내는 이 드라마가 보기 싫다 했다. 마음이 힘들다 했다. 사회생활을 재개하는 여성 앞에 놓인 고초가 혹독해 보인다며 걱정과 두려움을 감추지 못했다.
 
아내가 임신했을 때 다니던 회사는 육아휴직 기회를 주지 않았다. 출산 뒤 몸조리하는 아내에게 회사는 조직 개편이 있으니 곧장 복귀하라고 통보했다. 복귀하지 않으면 나중에 어디서 무슨 일을 할지 장담할 수 없다 했다. 회사에 다시 나가자니, 가만히 누워 아무것도 못하는 2개월짜리 아이가 눈에 밟혔다. 도움을 청할 곳도 없었다. 결국 원치않는 퇴사를 했다.
회사가 실제로 조직 개편을 했는지, 했다 해도 꼭 그때여야 했는지, 나도 아내도 그 실상은 알지 못한다. 핑계였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이해할 수 없었다. 여성의 삶에서 일과 가족의 조화를 중시하는 이른바 ‘마더(Mother) 리더십’ ‘핑크 리더십’을 강조해온 회사였다. 그 모든 게 가식이었단 말인가. 본사가 있는 미국의 엄마는 ‘리더십’이고, 한국의 엄마는 환영도 받지 못하는 건가. 정말이지 이해할 수 없는 결정이었다. 회사가 작성을 요구한 퇴직 서류에는 퇴직에 대해 향후 문제삼지 않겠다는 각서까지 포함돼 있었다.
 
어쨌든 아내는 실직자가 되고 말았다. 대학 진학이나 취업 같은 인생 주요 고비를 매번 단번에 해결했던 사람이다. 인생에서 큰 공백 기간이 없었으니, 처음 겪는 ‘무소속’ 신분이었다. 마음이 편할 리 만무했다. 한숨이 늘었다. “난 그저 엄마가 됐을 뿐인데, 모두가 축복하는 아이를 낳은 것뿐인데, 내 주변 환경은 너무 많이 바뀐 것 같아.”
 
나는 그 회사를 혼내줘야겠다고 생각했다. 어느 회사든 직원이 신청하는 출산휴가나 육아휴직을 거부할 권리는 없다. 거부하면 형사처벌1)을 받기 때문이다. 법적 조처를 취하리라 마음먹고, 여기저기 알아보러 다녔다. 하지만 아내가 극구 만류했다. 한번 마음이 떠난 회사에 아내는 더 바랄 게 없다고 했다. 이야기를 들어보니, 더 중요한 이유가 있었다. 새로 태어난 아이로 인해 일어나는 일이라면, 사랑하고 축복하고 좋아하는 일만 가득할 뿐 어떤 미움도 아쉬움도 남지 않기를 바란다 했다.
몇 달 지나 아내는 구직활동을 시작했다. 어린이집에 보낼 수 있을 때까지, 아니 돌이 될 때까지라도 아이와 함께 있어달라 권했지만, 아내의 불안은 컸다. 이대로 집에 눌러앉았다가 영영 일어서지 못할까 두려워했다. 아내에겐 육아 스트레스에 구직 스트레스가 더해졌다. 밤마다 피곤함에 찌든 얼굴로 이력서·자기소개서를 쓰는 아내는 정녕 안쓰러웠다. 얼마 지나지 않아 아내는 새 일자리를 구하는 데 성공했다. 육아의 바통은 한동안 내가 육아휴직을 해서 이어받았다.
 
대부분의 아빠는 ‘인사상의 불이익’을 염려하며 휴직할 엄두를 못 낸다. 하지만 엄마들도 출산·육아로 심각한 불이익을 겪는 것은 마찬가지다. 아빠는 겪지 않아도 될 일인데, 엄마는 겪어야만 하는 일이 되고 만다. 심지어 남성들은 그런 여성들의 불이익을 당연시하기도 한다. 김준규 전 검찰총장은 2011년 5월 서울대 법학전문대학원 초청 강연에서 “남자는 집안에 무슨 일이 일어나도 집안일을 포기하고 일하는데, 여자는 애가 아프다고 하면 일을 포기하고 애를 보러 간다”고 말하기도 했다.
아이가 아픈데 엄마·아빠 모두 오지 않으면 아이는 어떻게 될까. 검찰총장 같은 높은 사람이 “나도 당장 집으로 달려가 아이를 돌보고 싶었지만 그러지 못했다. 여러분은 그럴 수 있도록 해주겠다”고 할 날은 언제나 올까.
 
** 이 글은 월간 육아잡지 <맘&앙팡>(디자인하우스) 2011년 9월호에 실린 기고문을 약간 가필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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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남녀고용평등과 일·가정 양립 지원에 관한 법률. <19조> ① 사업주는 근로자가 만 6세 이하의 초등학교 취학 전 자녀(입양한 자녀를 포함한다)를 양육하기 위하여 휴직(이하 "육아휴직"이라 한다)을 신청하는 경우에 이를 허용하여야 한다. ② 육아휴직의 기간은 1년 이내로 한다. ③ 사업주는 육아휴직을 이유로 해고나 그 밖의 불리한 처우를 하여서는 아니 되며, 육아휴직 기간에는 그 근로자를 해고하지 못한다.다만, 사업을 계속할 수 없는 경우에는 그러하지 아니하다. ④ 사업주는 육아휴직을 마친 후에는 휴직 전과 같은 업무 또는 같은 수준의 임금을 지급하는 직무에 복귀시켜야 한다. 또한 제2항의 육아휴직 기간은 근속기간에 포함한다.  <37조> ④ 사업주가 다음 각 호의 어느 하나에 해당하는 위반행위를 한 경우에는 500만원 이하의 벌금에 처한다. -4.제19조제1항·제4항을 위반하여 근로자의 육아휴직 신청을 받고 육아휴직을 허용하지 아니하거나, 육아휴직을 마친 후 휴직 전과 같은 업무 또는 같은 수준의 임금을 지급하는 직무에 복귀시키지 아니한 경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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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ofile아이 둘의 아빠인 <한겨레> 정치부 기자. 21세기 인류에게 육아는 남녀 공통의 과제라고 믿는다. 육아휴직 등으로 나름 노력해봤지만 역시 혼자 가능한 일은 아니며, 사회적 인식의 전환이 필요하다는 걸 어렴풋하나마 알게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