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 자존감을 높이는 언어습관, 따라하기

막바지 방학을 맞이해 민호와 민호와 절친한 친구 한 명과 함께 서울랜드로 향했다. 집을 나서는데 기름이 부족하다는 램프가 빨간색으로 경고했다. 가던 길에서 잠시 빠져 나와 주유소에 들렸다. 주유를 하고 있는 사이 뒷 좌석에서 아이들 목소리가 들려왔다. 민호 친구가 먼저 말을 걸었다.
 “오십 천 원 주유하면 세차가 2천 원이래.”

 오십 천 원? 무슨 말인가 싶어 주위를 둘러봤다. 자동차 옆엔 ‘5만 원 주유시 세차비 2천 원’이란 플래카드가 걸려 있었다. 50,000원을 오십 천 원으로 읽으며 장난을 걸었다는 생각을 할 즈음 아이들은 이미 웃음 바다 속으로 들어갔다.
 “오십 천 원 주유하면 세차가 2천 원”

 친구의 말을 반복하면서 민호가 깔깔대며 웃었다. 그러더니 두 아이는 ‘오십 천 원’ 이란 말을 연이어 말하면서 입을 활짝 벌리며 숨이 넘어갈 정도로 웃어댔다. ‘별게 다 웃기는 구나’ 라고 생각을 하다가도 작은 농담에도 활짝 웃는 아이들이 부러웠다. 집에서 서울랜드까지 가는 길, 플래카드 하나에도 아이들은 웃음을 만들어 내는 재주를 지녔다. 아이들은 웃는다는 건 웃을 일이 많아서가 아니라 웃는 일을 찾아내는 거라는 걸 가르쳐주는 것 같았다. 아이들의 이야기를 가만히 들어보면 많은 걸 배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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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이들 장난은 놀이공원을 이동하는 내내 끊이지 않았다.
 “세 사람만 탈 수 있는 자동차는?”
 “몰라”
 “인삼차!”
 깔깔깔.
 틀린 아이도 웃으며 정답을 되풀이했다.
 “세 사람만 타는 인삼차! 깔깔”

 “이 세상이 흔들리면 어떻게 해야 하게?”
 “이 세상이 흔들리면….지진?”
 “땡!”
 “그럼 어떻게 해야 하는데?”
 “이 세상이 흔들리면 병원을 가야 해. 이빨이 흔들리면 치과에 가야 하니까.”
 “아~~~~~~! 이 세상이 흔들리니까, 치과에”
 깔깔깔.

 

 가끔씩 아이들 대화는 영어보다도 더 어렵고 때로는 외계어처럼 들리기도 하는데 특히 만화 이야기를 할 때에는 그랬다. 초등학교 저학년들에게 인기 많은 <터닝 메카드>란 TV 만화 속 캐릭터에 대한 이야기가 오고갔다.
 “터닝 메카드에 나오는 &&%%%%&&& 이거 알아?”
 “&&%%%%&&& ? “
 “응 &&%%%%&&&,“&&%%%%&&&은 그 중에서 힘이 제일 세.”
 도무지 알아들을 수 없는 말들. 하지만 두 아이는 모르는 단어가 나오더라도 그 단어를 똑같이 따라하며 묻고, 그리고 대답했다. 친한 친구들끼리 아이들은 상대의 언어를 자주 따라하며 즐거워했다.

 

 어른들은 어른의 언어를 쓰고 아이들은 아이의 언어를 쓴다. 시어머니들은 시어머니의 언어를, 며느리들이 쓰는 언어는 분명 시어머니와 달랐다. 언어가 다르다는 건 관심사항이 다르기 때문일 게다. 직장에 나간 남편이 주방 살림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지 않고, 전업 주부인 아내가 직장 상사를 욕하거나 회사의 문제점을 말하지는 않을 테니까. 관심 주제가 다르니 나이대별로 직업별로 각자 쓰는 언어는 아이들과 어른의 언어가 같을 리 없다. 그래서 하이데거는 ‘언어는 존재의 집’이라고 했다. 어떤 언어를 쓰는가는 내용을 떠나 그 사람을 거울처럼 보여준다. 언어는 그냥 그렇게 존재를 의미한다.

 아이들은 50,000원이라는 숫자를 오만 원으로도 읽고 오십 천 원으로 읽는 그런 ‘존재’다. 아이들이 오십 천 원이라고 장난스레 말을 걸어올 때 그대로 상대의 말을 받아 ‘오십 천 원’이라며 웃는 어른과 ‘장난을 치지 말고 오만 원으로 읽어라’라며 말한 어른이 있다면 아이들의 느낌은 어떠할까. 하이데거가 언어가 존재의 집이라고 한 말을 빌리면 아이들은 어른과 심리적으로 먼 거리감을 느낄 것이다. 그리고 언어과 닮지 않아 서로 멀어진 느낌을 아이들은 쉽게 ‘아빠랑은 또는 엄마랑은 말이 안 통한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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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을 하면 닮는다. 얼굴이 닮기 전에 상대를 온 마음으로 사랑하면 언어를 닮는다. 남자들이 술자리에서 한창 직장에 관한 넋두리를 쏟아내는데 “네 생각이 잘못됐다”라고 말하는 이와 같이 있다면 빨리 그 자리에서 나오고 싶을 테다. 명절의 끝자락에 시댁 욕을 하기 위해 카페에 모여 수다를 떠는데 며느리로서의 바른 자세를 요구하는 상대를 만난다고 해도 재수가 옴 붙었다는 생각을 하며 자리를 정리하고 싶은 생각이 들 수도 있을 게다. 상대의 말을 받아주지 않고 내 말이 설령 틀렸다고 하더라도 부정을 하면, 나의 생각과 나의 마음이 부정당한 느낌을 받으니까. 사랑을 하면 상대의 언어를 따라한다. 그래서 상대의 말을 따라하는 것만으로도 상대는 나와 긴밀한 정서적 유대감을 느낀다. 언어만 그럴까. 친한 친구들끼리 아이들은 서로의 의견을 쉽게 부정하는 일이 없다. 그러고 보면 부모인 우리도 먼 옛날 연애시절, 상대가 밥을 먹자는 말에 밥을 먹자고 대답했고 목이 마르다는 상대의 말엔 같이 물을 마시자고 했다. 그렇게 우리는 사랑을 하고 상대의 언어를 반복하며 서로를 만났다. 아이들의 언어를 따라하다보면 어느새 어른들은 아이의 세계 안으로 들어가 아이들과 만난다. 누군가와 가까워지고 싶다면 그 사람의 언어를 따라한다. 언어를 따라한다는 건 내가 나와 다른 너와 만나는 게 아니라 내가 나처럼 소중한 또 다른 나와 만난다는 걸 의미한다.

 

사랑하면 상대의 언어를 따라하고, 자신의 언어가 상대방의 입을 통해 들릴 때 자신은 상대로부터 한 인간으로 존중을 받는 느낌을 받으며 자신을 키워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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