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세돌의 ‘웃음’과 아이 교육

이세돌이 웃었다. 기계에게 세 번을 패한 뒤 이긴 그는 말할 수 없을 정도로 기쁘다라고 전했다. 그의 웃음이 반가웠다. 그의 웃음은 왜 알파고가 인간을 뛰어넘을 수 없는지를 가르쳐주는 웃음이었다. 이세돌이 이겨서가 아니라 이세돌이 웃어서 이겼다. 그의 웃음은 인간이 무엇인지를 확인 시켜주었기 때문이다. 인간은 웃을 수 있는 존재였다. 알파고는 웃지 않았다. 울지도 않았다. 패배한 순간에도 알파고의 감정은 없었다. 이세돌은 패했을 때 가슴 아파했고 승리했을 때 웃음을 지을 수 있었다. 그래서 이세돌이 알파고에게 바둑으론 졌겠지만, 모든 대국을 인간으로서 승리했다. 감정을 드러낸 이세돌은 그래서 단 한 번도 진 적이 없다. 그는 가슴 아파하는 감정을 지녔고 실망스러운 느낌을 목소리로 표정으로 전하며 인간이 기계와 다른 이유를 온 몸으로 보여주었다.

 

 이세돌의 기쁨은 가슴 아픈 만큼 기뻤을 테다. 그의 활짝 웃는 모습과 환희에 가득찬 목소리에서 그의 아픔과 고통이 느껴졌다. 이세돌 얼굴에 비친 웃음 속에선 마음 속에서 울었을 그의 지난 모습이 보였다. 심리학에선 부정적인 감정도 소중히 다룬다. 슬픔이나 분노, 상처가 나를 힘들게 하지만 그 시간만큼 힘들고 괴롭지만, 그 아픔의 깊이만큼 기쁨과 행복이 찾아왔다. 그래서 모든 감정은 소중하다고 했다. 억지로 자신을 고통이나 힘겨움으로 밀어붙일 필요는 없겠지만, 순간 느끼는 내 모든 감정은 내가 인간임을 가르쳐주고 있었다. 인간이 느끼는 모든 감정은 내가 기계와 다르다는 걸 알려준다.
잘 울지 않으면 잘 웃을 수가 없다. 가슴 아프지 않으면 가슴이 설렐 수도 없고, 화라는 감정을 느낀 사람만이 평온함이 주는 행복을 안다. 낮이 반가운 건 깊은 밤이 있었기 때문이고, 반짝이는 등대가 자신을 드러내기 위해서는 짙은 어둠이 있어야 한다. 터널을 지나가야 밖으로 나갔을 때의 기쁨을 알고 따뜻한 봄이 반가운 건 모진 겨울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감정이 없는 과학은 인간에 있어 신체의 한계를 뛰어넘는 방향으로 발전해 왔다. 인간의 발을 대신해 자동차는 더 빨리 그리고 더 멀리 달렸고, 날 수 없는 인간을 대신해 비행기와 우주선은 중력의 힘을 이겨냈다. 공간이동이 불가능한 인간에게 방송 카메라는 멀고 위험한 곳까지 인간의 눈을 대신해 사건의 현장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네이버 지식인은 인간의 기억 능력의 한계를 넘어섰다. 알파고는 빠른 계산 능력을 보여 주었다. 그러고보면 인간이 신체와 기억능력, 그리고 계산능력에서 기계에게 추월당한지는 이미 오래된 일이다. 단 감정만큼은 기계에게 내준 적이 없다.

 

 예술과 인성은 모두 인간의 감성에 뿌리를 내리고 꽃을 피운다. 동굴벽화에 그림을 그리며 자신의 마음을 표현했던 구석기 시대 사람들은 70만 년전부터 마음 속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인간은 내 마음 깊이 머물고 있는 감성들을 때로는 추상적인 그림으로도 그려냈고 감미로운 음의 연결로도 표현했다. 알파고와 이세돌간 바둑대결이 가르쳐 준 건 대결의 결과가 아니라 바로 인간이 나아가야 할 방향이었다. 그리고 아이에게 영어 단어보다 중요한 건 인간의 마음이며 논리적으로 따지며 말하는 것보다 소중한 건 상대의 마음을 헤아리는 일일 거라고 생각했다.

 

 감정을 키우기 위해선 감정의 언어를 써야 한다. 감정의 언어는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감정의 언어는 감정의 질문을 했을 때 찾을 수 있다. 그래서 감정을 키우는 교육은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교육이라는 걸 이번 바둑 대결이 가르쳐주었다. 자신의 감정을 잘 알아차린 사람만이 남의 감정을 잘 알아차린다. 알파고가 이세돌을 뛰어넘을 수 없는 이유는 알파고는 이세돌의 감정을 느낄 수가 없다. 그건 알파고 안에 어떠한 감정도 없기 때문이다.

 나의 말을 되돌아 보니 알게 모르게 감정을 경시했던 말들이 습관처럼 튀어나와 아이에게 향했다.
 “다 울고 이야기 해.”
 아이가 울 때마다 아빠인 난 다 울고 이야기하라는 말을 했다. 아이는 슬픈데 그 슬픔의 감정을 빨리 끝내야 할 설거지처럼 여겼다. 아이가 울 수 있는 것도 기계와 다르기 때문인데 가끔씩 난 아이의 울음섞인 소리가 싫었다.
감정을 소중히 해야 한다고 다짐을 했지만 가끔씩 아이의 감정보다 내 감정에 더 집중을 했었다. 지난 시간을 떠올리며 다시 다짐을 했다.

 

 교육. 가르칠 敎 자에 기를 育자 인 교육이란 단어를 다시 정의해야 할 것 같았다. 아이들에게 무엇을 가르쳐주고 아이 안에 있는 무엇을 길러줄 것인가? 그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졌다. 아이에게 인간은 기계와 다르게 풍성한 감정이 있다는 사실을 알려주고 싶다. 그리고 아이에게 길러주고 싶은 게 있다면 그건 아이의 감성이었다.

아이를 인간답게 키우고 싶다고 생각을 하면서 아이와 대화를 상상했다.
“민호야, 아빠랑 이야기를 했더니 어떤 느낌이었니?”
“숙제를 하고 나니 어떤 느낌이었니?”
“친구와 다투고 나니 어땠니?”

느낌과 감정. 느낌과 감정은 표현할수록 커진다. 톨게이트에서 동전을 받던 사람들이 무인 교통카드에게 자리를 내주고, 백과사전을 만드는 사람들이 네이버 지식인에게 직업을 내준 현실에서 아이가 기계와 달리 자신의 감정을 잘 알아차리고 부정적인 감정도 소중하다는 것을 느끼며, 타인의 감정도 잘 알아차려주었으면 좋겠다 라는 생각을

이세돌의 웃음을 보며 했다.

기계가 스스로 감정을 느끼지 못하고, 그래서 타인의 감정도 알아차리지 못하며, 그래서 배려라는 미덕을 모르는 한 기계는 인간을 앞설 수 없다.

 

 

1381372_434577036663906_502874597_n.jpg 아이가 컴퓨터 자판을 자주 두드리기보다 다른 이의 손을 자주 잡고
선명한 모니터를 바라보기보다 따뜻한 미소와 마주하며
기계음에 덜 귀 기울이고 목소리에 더 경청하고
자기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면서도, 다른 이들의 시선이 있다는 걸 생각하고
숫자보다 별을 사랑하고, 그 별들에 이야기를 담아내고
주입받은 명령의 말보다 따뜻한 단어를 골라 말을 건네고
이기기 위해 경쟁하지 않고, 나누기 위해서 경쟁을 하고
무엇이 문제라고 지적하고 밝혀내기 보다는
고맙고 감사한 마음을 간직한
그런 아이로 자라나기를 소망했다.

그리고 그런 아이를 키우기 위해
기계처럼 차갑기보다는
따듯한 아빠가 되기를 기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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