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을 앗아간 영주댐을 바라보다 - 지율스님과 함께한 낙동강 답사기 #2 지율스님과 함께한 낙동강 답사기

아침부터 자동차가 말썽이다. 이미미님의 자동차와 어제 저녁부터 합류한 반수홍님의 차가 전혀 움직이질 않는다. 보닛을 열어 뜨거운 물을 부어보지만 돌아가는 엔진소리는 목이 쉰 말 울음소리 같다.

기상청에서 발표한 봉화의 날씨를 보니, 아침기온이 무려 영하 24.7도를 표시하고 있다. 자동차가 엄살이라도 피울 만한 날씨다. 다행히 문종호님의 차와 내 차는 시원시원하게 시동이 걸렸다. 둘 다 화물차라는 게 함정. 시동이 걸리지 않는 차는 보험회사에서 구조를 나올 때까지 세워두기로 하고, 나머지 사람들은 화물차를 타고 이동하기로 결정했다.

좌석에 최대한 많이 타보지만 그래도 남는 몇 사람은 짐 칸엘 오를 수밖에 없다. 최대한 자의를 발동해서 선발했다. 지율스님을 포함해 8명 가량. 자신들이 가진 옷들을 최대한 활용하고 담요를 가져온 분은 담요를 덮기도 했다. 나도 여름날엔 짐칸에 탄 경험이 많지만, 영하 20도가 넘는 곳에서 짐 칸에 타는 건 흔치 않은 경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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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하 25도의 혹한에 두 대의 자동차가 뻗었고, 결국 사람들은 '짐'이 되어버렸다.



영주댐 건설로 인한 수몰예정지를 돌아볼 계획이다. 첫번째 목적지는 멀지 않았다. 짐 칸의 사람들을 생각해 느릿느릿한 속도로 달려 30여분 만에 닿았다. 어제 괴헌고택 일대에서 본 것처럼 도착한 곳도 1년 정도씩 묵은 논들이 펼쳐져 있었다. 


스님은 먼저 내려 논두렁 길을 따라 앞 서 갔다. 논두렁 길이 끝나고 제방이 만나는 곳에는 커다란 나무가 한 그루 서 있었다. 그 나무는 꼭 ‘빗자루’같다는 느낌. 겨울철 앙상한 가지만 남고 잎이 다 떨어지더라도, 그런 느낌을 받은 건 처음이다.

도착해보니, 큰 교통사고를 당해 전신에 붕대를 감고있는 사람처럼, 그렇게 붕대가 감겨져 있었다. “나뭇가지들이 넓게 펼쳐져 있었어요. 이것 보세요. 다 잘라버렸어요.” 지율스님 말씀이다. 스님의 목소리엔 언제나 감정이 잘 묻어난다. 이번엔 슬픔. 잘려나간 부분을 보호하려 붕대를 감아놓았던 것이다. 이전을 준비하고 있다고 했다.

작은 나무들은 그 자리에서 사람 손에 뽑히고, 톱으로 잘려지고, 굴삭기로 문드러졌지만, 이 아름드리 나무는, ‘그런 사람들’에게서 가치를 인정받은 것인지 다행히 이전을 하는 것이다. 생명의 가치나 문화적 보다는 경제적 가치가 우선이었을 것을 생각하니 안타까운 마음이 일었다. 생명이나 문화적인 가치에 우선 순위를 두었다면 댐 따위는 생각조차 하지 않을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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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은면 내성천 옆을 지키고 있는 아름드리 왕버들. 거꾸로 세워놓은 빗자루 같다. 나무 뒤쪽으로 보이는 숲은 모두 베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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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전을 위해 교통사고가 난 환자처럼 붕대를 칭칭 감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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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픈 현실이다.


“눈을 감아보세요. 그리고 어떤 새가 우는지 들어보세요.” 박중록 선생님은 아이 어른 할 것 없이 모두의 눈을 감겼다. 강 건너편의 굴삭기도 숨을 고르는 상태. 바람만 움직이며 귓바퀴에 잠시 머물다 가는 상황이 되었다. 가만히 있으니 정말 새 소리가 들렸다. 마음 속으로, ‘찌르르르’ 하나, ‘비~ 비~’ 둘, ‘찟, 찟’ 셋.

눈에 보이는 건 다 참새같은데 세 가지나 구분해낸 것도 용했다. 몇가지의 소리를 들었냐는 박중록 선생님의 물음에 모두가 이구동성 “세 가지요!”하고 합창했다. “가장 많이 들리는 ‘찌르르르’하는 소리는 어제 보았던 ‘쑥새’입니다. 여기서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어요. ‘비~ 비~’하고 들리는건 황새 쫓아가다가 다리가 찢어졌다는 ‘뱁새’에요. 그리고 혀를 차는 듯 우는 새 있죠? ‘쯧, 쯧’하고. 그건 ‘멧새’에요. 턱에 노랑 털이 나 있어서 ‘노랑턱멧새’지요.” 아뿔싸. 마음 속으로 나의 무식함을 한탄했다. ‘참새가 없다니!’

고성능 망원경을 설치해 새를 관찰했다. 눈으로 보이는 건 다 ‘참새’일 뿐이었는데, 작은 렌즈 안에는 정말정말 귀여운 새들이 나뭇가지에 매달려 방금 들었던 그 소리를 내고 있었다. 옛 사람들은 어찌 망원경도 없이 저 작은 새들을 다 구분해냈을까. 자연과 가깝게 지냈기 때문에 그랬겠지? 섣부른 결론을 내리고 다음 장소로 이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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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소리를 듣기 위해 모두 눈을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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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으로 보이지 않아 어떤 새가 있는지 몰랐지만, 귀로도 새들을 구분하는 방법을 배웠다.


등반가들을 취재한 TV다큐 속의 에베레스트 베이스 캠프에서나 봄 직한 원형의 큰 텐트가 공사가 한창 진행중인 내성천 제방 위에 설치돼 있었다. 그 옆에는 한 쪽 면에 통유리로 되어 있는 작지 않은 컨테이너도 놓여져 있었다. 다름아닌 지율스님의 거처다.

텐트 속에는 없는 것 빼고 다 있다. 가재도구도 대충 갖추어져 있고, 한쪽에는 흙구들로 된 침대도 있다. 이 흙구들은 문종호님과 영주 부석면에서 옹기를 만드시는 분이 힘을 모아 만들었다고 한다. 텐트 생활을 자주 해본 터라 완전히 낯설지는 않았지만, 크고 아늑한 분위기는 여느 텐트에서 느끼는 것과는 달랐다.

그곳에선 이미 와 본 사람과 처음 온 사람이 확연히 구분됐다. 처음 온 사람들은 고개를 들고 연신 두리번 거렸기 때문이다. 나는 전자에 속하는 사람이어서 다행히 조금 덜 한 편이었다. 이곳에서 지내며 강을 바라보며 마음 아파하는 스님의 모습을 떠올리니 가슴이 찡했다. 거처 바로 앞에서 모래를 퍼 내는 공사를 하고 있었기 때문에 더욱 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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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성천 바로 옆에서 강을 지키고 있는 지율스님의 거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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댐에 물을 담기 전, 경제적 가치가 높은 모래를 퍼 낸다. 2m 가량을 퍼 냈음에도 강바닥에 모래가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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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포크레인이 있는 바로 그 자리다. 이토록 아름다웠건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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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은 걷다말고 물 속에 몸을 던졌었다. 



3년 전, 녹색연합의 활동가로 있을 때 사람들과 이곳에 순례를 왔었다. 평은면의 송리원 휴게소에서 금광마을까지 강을 따라 걷는 것이다. 자갈이 많은 다른 강과는 달리 이곳에는 뽀독뽀독한 모래들 뿐이어서 전혀! 신발을 신지 않고 걸어도 무리가 없었다. 오히려 모래가 주는 감촉이 좋아서 신발을 신고 싶지 않았다.

물길을 따라 첨벙거리며 걷기도 했으며, 모래톱에 올라서기도, 심지어 강을 건너기도 했다. 가장 깊은 곳이라고 해봐야 허벅지 정도였다. 순례에 참가한 아이들은 시도 때도 없이 물로 뛰어들었다.

빠질 위험도, 바위에 부딪힐 위험도 없어서 모두가 마음 놓고 즐길 수 있었다. 우리나라 어디에서 이렇게 놀 수 있을까. 또, 어딜가서 이렇게 아름다운 풍경을 볼 수 있을까. 이곳을 방문했던 해외의 하천전문가들 조차도 ‘세계자연유산’으로 등재가 되어도 손색이 없다고 극찬을 했을 정도니까.

그랬던 그 강이, 눈 앞에서 조금씩 사라지고 있었다. 낙동강을 준설하는 것과는 다른 양상이다. 원래의 강바닥 높이에서 2m 가량 모래를 파내는 것이지만 마치 물 밖으로 드러난 모래를 퍼내는 것 같다. 수량이 많지 않은 겨울인데다, 물길을 먼저 내놓고 나머지 부분을 파는 것일테다.

만약 영주댐이 완공된 후 이 지역이 수몰된다면 이 모래들까지 모두 잠길 것이므로 미리 파내는 것이란 지율스님의 설명. 돈 되는 건 다 팔아버리겠다는 심산이다. 영주댐 건설지에서부터 영주 이산면 일대까지 파내는 모래의 양은 무려 200만루베라고 한다.

자연을 두고 ‘아낌없이 주는 나무’라지만, 현명한 사람이라면 최소한 자기 자신의 자식이 살 수 있을만한 ‘나무’가 있어야 하지 않나. 그 아들은 또 그 자신의 아들을 생각해야 하는 것이 ‘생명된 도리’다. 파헤치고, 채우고, 팔고... 너무들 한다 싶었다. 과연 지구상의 누가 ‘자연’을 ‘허락’할 수 있단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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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동강/내성천의 현실을 알리기 위해 조계사 앞을 일년 넘게 지켰던, 스페이스 모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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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이 변하는 현실이 고스란히 담겨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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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대강 사업 낙동강 구간(사진은 상주보 오리섬, 경천대)의 비교사진 판넬들. 시민들에게 진실을 알리기 위해 거리를 누볐었다.


스님 거처 옆 컨테이너는 다름아닌 조계사 앞을 지켰던 ‘스페이스 모래’다. 스님은 이곳에서 내성천이 병들어 가는 모습을 사람들에게 알리려 무진 애를 썼다. 그 속에는 그 때의 노력들이 고스란히 남겨져 있었다. 낙동강 경천대 주변에서 머물며 낙동강을 기록했던 것은 물론 최근에 내성천이 급격히 변해가는 모습도 남겨져 있었다.

하나같이 충격적인 현실이지만 생각만큼 사람들은 움직이지 않았다. 자연을 지키는 걸 두고 이상理想이라 여기는 풍토 때문이리라. 그래서 환경운동을 하는 사람들을 두고 ‘현실을 직시하라’고 다그치기도 한다. 나는 그럴 때마다 벙어리 냉가슴 앓는다.

그곳에서 간단히 점심을 해결한 뒤 다음 답사지로 떠났다. 바로 이 내성천을 파괴하는 주범인 ‘영주댐’ 건설현장이다. 영주댐이 막 건설되는 때 가본 뒤로 그곳을 제대로 본 적이 없다. 댐 공사장 주변으로 사람키보다 곱절정도 됨 직한 높은 가림막이 설치됐기 때문이다.

이번에도 그런가보다 했는데 다행히 볼만한 장소가 있었다. 마침 눈이 쌓여 차량의 통행도 없어 안전하기까지 한데다 댐을 내려다 볼 수 있는 높은 곳이었다. 사실 이 일대는 댐공사로 늘 대형 덤프트럭이 다녀서 ‘정차’조차 불가능한 곳이다. 이런 행운?은 늘 이곳을 오가시는 지율스님 덕분이다.

댐은 생각했던 것보다 더 빨리 지어지고 있었다. 2009년 12월부터 시작한 공사라고는 믿기지 않았다. 불과 3년만에 높이가 55m, 길이가 400m나 되는 댐을 거의 다 지어놓고 있었다. 이런 수치가 없더라도 눈에 보이는 것만으로 거대함을 느낄 수 있다.

댐이 완공된다면 수몰될 지역, 즉, 댐의 상류를 바라보았다. 눈 앞에 보이는 대부분의 것들이 물 속에 잠길 것이라 생각하니 아찔했다. 그간 다녔던 길이며, 아이들과 놀았던 하천하며, 가을이면 풍요를 가져다 주었던 논밭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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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주댐 이곳 저곳의 변화를 설명하는 지율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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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주댐은 높이 55m, 길이 400m의 중형 댐이다. 무려 10.4 k㎡ 라는 어마어마한 면적이 수장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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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몰예정지를 바라보는 참가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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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도 이곳을 보고 마음이 편하지는 않을 것이다.



고향을 등지고 떠나야만 했던 ‘댐 실향민’들의 마음이 조금이나마 와 닿는 것 같았다. ‘내가 만약 저기 살았다면, 내 어릴적 기억이 저곳에 남겨져 있다면...’ 생각하면 할 수록 분하고 괴씸했다. 그래도 이곳이 물에 잠기게 되면 아예 지구상에서 멸종해버릴지도 모르는 그런 생명에 비할수는 없겠지. 그 생명들에겐 같은 인간으로써 미안한 마음이 일었다.

예전 같으면 화가 불같이 피어올라와서 안절부절을 못할만한 상황이지만 나역시도 이제 이런 공사에 이력이 난 상태이고, 또, 그렇게 화를 낸다 한들 당장 바뀌는 것은 없다. 파괴에는 빠른 시간과 무식함이 필요하지만, 살리는 데는 느린 시간과 많은 정성이 필요하다. 더군다나 부정적인 기운보다 긍정적인 기운이 훨씬 더 도움이 된다.

지율스님은 답사하는 동안 긍정의 힘을 늘 강조했다. 그래서 파괴되는 자연 앞에서는 눈물을 흘리지만 그곳을 파괴하는 공사 노동자들에겐 화를 내지 않는다고 했다. 사실 먼저 바뀌어야 할 것은 그 노동자들이 아니라 이 파괴를 명령하는 자들과 방조하는 많은 이들이다. 그들을 설득하는데는 ‘화’는 역효과만 부를 뿐이다. 시간을 두고 ‘생명’의 가치와 아름다움, 조화를 알려야 한다.

그렇다. 긍정의 힘을 또 느껴봐야 하는 시간. 바로 놀이다. 숙소가 있는 무섬마을에 도착하자마자 아이들은 강변으로 뛰어 나갔다. 눈쌓인 곳에서 할 수 있는 최고의 놀이는 머니머니해도 눈싸움이 최고이리라. 세진군의 어머니인 아름드리님의 ‘지휘’아래 편을 나누고 싸움을 시작했다. 세상 싸움 중에 이처럼 재미난 싸움이 또 있을까. 조용한 강변에 아이들 웃음소리가 넘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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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의 마무리는 즐거운 눈싸움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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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하 20도에도 불구 땀 흘리며 뛰어다니는 아이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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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들에 불을 넣고 있는 참가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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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가슴 속의 불마냥, 구들 불도 활활 타올랐다.



숙소에서는 저녁과 방을 데우기 위한 준비가 한창이다. 이곳은 지율스님이 알게된 한 스님의 본가로 지금은 비어있는 상태여서 쓰도록 했다고 한다. 이 일대에서 유명한 까치구멍집. 용마루 양쪽으로 공기가 통하게 끔 구멍을 냈는데, 그 구멍이 까치둥지와 비슷하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 한다.

대문을 들어서면 마루가 있고, 마루를 중심으로 왼쪽으로는 방이 두 개, 오른쪽으로는 방과 부엌이 있다. 오랫동안 비어있던 터라 구들에 불을 넣으려 애를 썼다. 불 붙이는 데는 흥미가 높아 나도 붙어 해보지만 금세 프로들에게 자리를 내주고 말았다. ‘프로’인 지율스님과 문종호님은 실력이 예사가 아니었다. 난 그저 손바닥을 내밀고 지켜보는 게 최선. 아, 슬프다.

구들은 생각보다 늦게 달아 올랐다. 평소 구들을 떼며 살고있는 문종호님은 “최소 3시간 정도는 때야 온기가 올라올거에요.”라고 말했지만, 어지간히 반응이 없었다. 해가 지고 난 뒤는 아침기온에 급격히 가까워지고 있었다. 결국 강 건너의 찻집에서 두어시간 피신을 다녀 온 뒤에야 방엔 온기가 들어와 있다.

바깥 공기가 워낙 차가웠으므로 허술한 옛 집 창호지 문으로는 안팎이 잘 구분되지 않았다. ‘방은 따뜻해도 코 끝이 시리다’고 누가 말했던가? 이곳과 비슷했던 외할머니 댁에서 잠을 자던 따뜻한 기억을 꺼내 덮곤 이른 잠을 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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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ofile안녕하세요. 채색입니다. 봄마다 피어나는 새싹처럼 조화롭게, 아름답게 살아가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