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가락을 움직여본다. 손가락 관절과 피부를 보호하고 긴장감을 주기 위해 꼼꼼히 마디에 감은 클라이밍 테이프가 이젠 정겹게 느껴진다. 심호흡을 크게 하고 암벽을 올려다본다. 몸과 마음을 이완시킨다. 15m 높이의 실내 암벽에는 갖가지 모양의 홀더(손잡이)가 앙증맞게 붙어 있다. 홀더에 올린 두 손을 가슴 높이까지 당긴다. 느낌이 좋다. 손가락 끝에 홀더가 찰싹 달라붙는다.

 오른발을 당겨 올려 초승달 모양의 납작한 홀더 위로 내딛는다. 온몸이 암벽에 붙는다. 고개를 들어 저 멀리 있는 성냥갑 모양의 사이드 홀더를 노려본다. 오른손을 쭉 뻗어 올려 그 성냥갑 홀더를 부드럽게 낚아챈다. 오른발 아래로 왼발을 늘어뜨린다. 온몸을 감쌌던 긴장을 푼다. 뒤 허리춤에 달린 초크백에 손가락을 넣어 초크를 묻힌다. 이젠 오른발을 쭉 편다. 동시에 왼팔을 뻗는다. 손가락 두 개가 간신히 들어가는 구멍 홀더가 왼팔을 맞이한다. 왼팔을 당기며 왼발을 작은 홀더 위에 비벼 놓는다. 살짝 내려다본다. 구명 자일을 잡고 올려다보는 후배들의 시선이 따사롭다.

 

암벽 1.jpg » 신홍수씨가 서을 수유동의 노스페이스 다이노월에서 암벽타기를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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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홍수(60)씨는 평범한 전업주부이다. 구순을 넘긴 시아버지를 모시고 살고 있다. 30대 중반의 아들이 둘 있다. 신씨는 5월 말 의미있는 암벽등반을 하기로 했다. 환갑맞이 인수봉 암벽등반이다. 몇명의 산 친구들이 함께하기로 했다. 인수봉 정상에 올라 서울시내를 바라다보며 건강하게 살 수 있는 것에 감사할 참이다. 5년 전부터 시작한 암벽등반이다. 마침 100번째 인수봉 등정이다. 젊은 시절 바라만 보아도 아찔하게 여겼던 인수봉을 이젠 안방 드나들듯 오른다. 인수봉의 모든 등정 루트가 눈을 감아도 선명하게 떠오른다. 학창 시절엔 운동에 관심이 없었고, 결혼 뒤에도 별다른 운동을 하지 않던 신씨가 환갑의 나이에 인수봉을 쉽사리 오를 수 있게 된 것은 몸에 난 혹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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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0대 중반 신씨는 식도게실 절제수술을 했다. 식도에 작은 혹이 생겼던 것이다. 수술 이후 신씨는 산을 다니기 시작했다. 운동을 하지 않으면 더 큰 병이 생긴다고 의사가 경고했다. 하지만 몸에는 혹이 이곳저곳 자리잡았다. 유방에 16개, 림프샘(임파선)에 1개의 양성 종양이 생겼다. 겁이 났다. 그럴수록 신씨는 산의 품에 안겼다. 산에 다니며 산길에 익숙해졌다. 그러다가 우연히 인터넷 암벽등반 모임에 가입했다. 이전에 산길을 걸을 때 암벽을 타던 이들을 부러운 눈길로 바라보곤 했다. 그들은 헬멧을 쓰고 자일을 어깨에 건 채 절벽을 올랐다. 아니 바위를 ‘탔다’라는 표현이 정확했다. 발만 사용해 걸어 오르는 산행과 달리 손과 발을 함께 써서 오르는 등반이었다.

 

암벽 4.jpg » 신홍수씨가 백운대를 오르고 있다. 신홍수씨 제공

 

암벽등반을 위한 기초훈련을 거쳐 신씨가 처음 오른 인수봉 루트는 ‘고독길 루트’였다. 비교적 쉬운 길이다. 하지만 신씨는 리지(산등성이)로 오르는 도중 암벽 중간에서 ‘오토바이’를 타야 했다. 갑자기 두려움이 몰려오면서 바위에 디딘 두 다리가 덜덜 떨리는 것이다. 한참 동안 그렇게 다리를 떨다가 간신히 오를 수 있었다.

 암벽등반을 시작하니 신체에 변화가 생겼다. 걷기 산행을 할 때보다 체중은 4㎏ 정도 늘었지만 바지는 그대로 입을 수 있었다. 몸에 근육이 생긴 것이다. 몸에 자라던 혹도 성장을 멈추었다. 암벽등반이 즐거우니 스트레스도 사라졌다. 손가락으로 몸을 감당해야 하니 자연스럽게 체중 조절을 위해 식이요법을 했다. 50대 초반에 온 갱년기 증세도 1주일 만에 사라졌다. 젊은 시절보다 기운찬 육체를 갖게 됐다.

 가장 익숙한 인수봉 도선사길로 오른다. 배낭엔 김밥과 초콜릿 등 행동식을 넣고, 백운대를 거쳐 인수봉에 다가선다. 이제 바위에 매달려 행동식을 먹는 일도 익숙하다.

 신씨는 3년 전부터 동네에 있는 인공 실내 암장에 다니며 본격적으로 스포츠 클라이밍을 배웠다. 유명 아웃도어 업체에서 운영하는 실내 암장의 회원은 200여명이다. 신씨는 가장 나이가 많은 회원이다. 주로 볼더링을 한다. 볼더링은 암벽화를 신고 맨몸으로 인공으로 만든 홀더를 잡고 오르는 스포츠다. 수직으로 몸을 끌어올려야 한다. 중력을 거역하고 체중을 극복해야 한다. 수평의 세계에서 하는 일상적인 등반에 비해 수직의 세계를 추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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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장이나 암벽을 오르다가 어려운 곳을 만나면 본능적인 두려움이 온몸을 감싼다. 바로 추락에 대한 공포이다. 이런 상황에 부닥치면 손과 발이 접촉하고 있는 홀더에 정신을 집중시킨다. 몸속에서는 아드레날린이라는 호르몬이 분비된다. 아드레날린은 뇌와 뼈대, 근육 부분의 혈관을 확장시켜 근육이 위기 상황에 잘 대처할 수 있게 만든다. 마치 복잡한 수학문제를 풀듯이 손과 발의 위치를 계산한다. 독일의 클라이머 볼프강 귈리히가 “두뇌는 등반에서 가장 중요한 근육이다”라고 말한 이유이다.

 머리와 몸을 써서 어려운 곳에 오르면 이번엔 엔도르핀이라는 호르몬이 분비된다. 위험한 상태에서 벗어났다는 안도감과 함께 즐거움과 행복감을 강렬하게 느끼게 해준다. 신씨는 몸 안에서 아드레날린과 엔도르핀이 번갈아 분비되는 것이 암벽등반의 ‘치명적인 매력’이라고 말한다. 중력뿐 아니라 시간의 흐름도 거슬러 젊음을 찾게 됐다고 신씨는 말한다.

 신씨는 거창한 꿈은 없다. 남들은 요세미티의 하프돔이나 히말라야의 고산 등정을 꿈꾸지만 그의 꿈은 소박하다. “내일도 저 인수봉을 오를 수 있으면 감사할 겁니다.”

 암장에 매달려 있던 신씨는 마지막 멀리 있는 홀더를 바라다본다. 그리고 부드럽게 오른손을 뻗었다. 확보물에 클립한다. 구명 로프를 잡고 있던 후배들이 외친다. “언니 최고야.”

 글·사진 이길우 선임기자 nihao@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