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에서의 수행-끝없는 망상의 끈 민웅기의 수련일기

민웅기의 수련일기 2/인(因)과 연(緣)을 따라서


요가수행을 위한 백일기행을 마치고 시작한 것이 명상수행이었다. 인연에 따라 수련일정을 잡으니 ‘요가’라 ‘명상’이라 구분하지만, 본래 요가와 명상은 한가지의 다른 이름일 뿐이다.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다’는 세간의 금언은 수련의 여정을 가는 나에겐 몹시 의미있고 희망을 주는 말이 된다. 어느 날 내가 요가수행에 뜻을 내었더니 예기치 못한 이로부터 절집의 수행처를 안내받게 되었고, 하여 한국선요가의 명승인 요가의 사부를 만나게 되었다. 내가 꽤 오랫동안 위빠사나 명상을 염원했고 그에 관한 수련서들을 탐독하면서 ‘나홀로’ 수행연습을 긴하게 했다. 그 뜻이 전해진 누군가를 통해서 가까운 도심의 위빠사나 선승을 소개받게 되었고, 뿐만 아니라 세계적인 명상단체가 진행하는 단기간의 집중수행에 참석할 기회를 갖게 되기도 하였다. 그리고 이번에는 내가 직접 의도하거나 바라진 않았다할지라도 마음깊이 내재한 그 어떤 나의 구원한 꿈과 연관되어 나타난 것이 아닐까 생각되는 사건이 역시 나를 기다리고 있었으니.           
 
 사람이 바람이 나면 한꺼번에 나는 모양이다. 인도에서는 중년의 나이가 되어 어느 정도 가정과 사업을 이룬 다음에는 집을 떠나 오로지 자신만을 위하여 수행하는 문화와 풍습이 있는데, 이를 ‘산야사’(베다, 산스크리트어로 ‘완전한 포기’를 뜻함)라고 말하고, 이렇게 집밖을 떠돌며 수행에만 전념하는 자를 ‘산야신’이라고 부른다. 부연하여 설명하면, ‘산야사’란 모든 세속적인 것을 포기하고 금욕과 무소유의 삶을 살며 영적탐구에만 헌신하는 ‘유행기(遊行期)’(떠돌이 방랑자의 수행기)의 삶을 일컫는 말이다.  마치 내가 인도의 산야사나 되는 냥 가출을 일삼게 되니 줄줄이 출가의 연이 내게 다가오기 시작했다.
 
 십수 년간의 묵은 기억의 껍질들을 한 겹 한 겹 벗겨내고 있다. 하여 그날의 나를 되새김질을 해본다. 참으로 무상(無常)한 일이다. 그 순간이란 지금 내게 남아있지 않다. 그때로 돌아간다는 건 불가능하고 의미도 없다. 다만, 그 묵은 순간들이 인과로서 남긴 지금을 기록하고 음미할 뿐이다. 그리고 그 일은 진실로 쉽지 않다. 왜냐하면 아차하면 감추고 싶은 대목과 지점이 눈앞을 가로막아서기 때문이다. 그것들과 한참 실랑이를 벌인 끝에 극적으로 타협을 했다. 때론 눈을 감고 때론 눈을 뜨기로 했다. 때론 허구를 그리고, 때론 그림자 뒤에 숨어서 숨바꼭질을 하기도 할 것이다.
 
 내 안의 방해자에겐 많은 양보를 얻어내었다. 그리고 늘 나를 가장한 ‘나의 그림자’와 ‘그림자의 그림자들’을 상당부분 들추어내 까불려버렸다. 한층 홀가분한 심정으로 그날 그 순간들을 돌이킬 수 있게 되었다.한편, 나와 연관되어 흘렀던 인연들에 관한 얘기들에 대해선 조심스러웠다. 어차피 지금 돌이키는 어떠한 사실과 정황과 인물들도 ‘가상’(假想)(기억 속에서 재구성된다는 측면에서)일 수밖에 없다는 점에 착안하여 ‘허구성’을 불가피하게 끌어들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듯 치우고 제거한다고는 했으나, 그 치우는 자도 치우는 대상도 꿈속 같아서, 꿈속의 꿈속 같아서, ‘허상’(虛想)일 수밖에 없음에 이르러서는 필설의 ‘무상성’(無想性)과 짝하여 역시 그 형용 또한 허공에 핀 꽃 같을 것이로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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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절에서의 요가 수행
 
 남도의 어느 이름 없는 사찰을 찾아서 몇 번이나 전화를 하고 나서야 사내와 그 친구는, 어렵사리 벌교를 지나 고흥의 초입에 있는 한 자그마한 절집에 들어서게 되었다. ‘한국선요가총본산 대한불교조계종봉두산 제석사’ 라고 길게 쓰인 표지석을 감고 돌아서 마을 안길을 주욱 타고 들어가니, 경사 급한 시멘트 도로위로 높다란 석축을 쌓은 성곽 같은 것이 나온다. 이름 하난 지독하게 길군, 사내는 이리 길고 장황한 표지판은 금생에 본적이 없기라도 한 듯 그 기나죽한 이름의 뜻풀이에 골머리를 썩히는 눈치다. 대체 뭣 하는 곳이람.
 
 널따란 아래께의 주차장에다 차를 세워놓고 밀짚모자를 고쳐쓴다. 일단 저 계단을 올라가면 뭐가 나오겠군. 계단을 오를 때마다 입속으로 숫자를 중얼거려보지만 몇 번이나 고쳐세기를 반복한 다음에야 끝이 보인다. 절마당엘 당도하니 깎아지른 경사면의 자리치곤 체법 너르다. 눈을 치켜드니 웃지방에 허술허디허술한 한 채의 낡은 한옥이 날아갈 듯 기대어 서있고, 왼쪽으로 덩실하게 대궐 같은 집이 한 채 바로 눈에 들어온다. 옳지, 저게 맞고만. 섬돌 위엔 가지런한 신발들이 수두룩하게 늘어서 있었다.
주말 산중에 왠 손님들이 이토록 많을까.
 
 알고 보니 이 절의 선방이었다. 방안에선 무언가를 묻고 답하는 소리가 왁자하다. 절집에 도둑이라도 들었나, 왠 생기가 이토록 그득하게. 오늘처럼 절집에 자발적으로 목적과 의도를 갖고 찾아든 건 예전에 없던 일이다. 사내는 조심스럽게, 스님, 하고 불렀다.
 
 선방에 사람들이 모여든 건 주말 요가 수행을 위해서였다. 개중엔 요가 선생도 상당수가 포함되어 있었고, 가까이는 고흥의 인근 면지역에서부터 광주, 서울, 완도, 심지어 부산에서 온 참가자도 있었다. 하아, 놀랍군, 도대체 어떤 분이기에.
 사내는 내심 속의 궁금증을 풀기위해 스님의 신상에 관한 요모조모를 출입이 오랜 참석자에게 넌지시 물어 들었다. 스님의 나이를 물어 무엇하랴만 속세의 나이론 사내보다 약간 적어 보였다. 보통이하의 키에 눈이 부리부리하고 잘생긴 인상에 운동선수라면 좋을 다부진 체격이 우선 눈에 들어왔다.
 
 ‘한국선요가’의 본산을 자처하는 스님은 부산의 모 암자로 본래 ‘선무도’를 배울 목적으로 출가했다고 했다. 나중에 우연찮게 한번 슬쩍 본 일이지만 스님의 공중3단 옆차기는 기가 막혔다. 스님이 평소에 대놓고 무술을 연습하거나 시연한 적이 없기 때문에 절에 출입하는 사람들 그 누구도 그렇게 기발한 스님의 무술 동작을 볼 기회가 없었을 것이다.
 다만, 어느 날엔가, 매주 토요일 저녁이면 하는 요가수련 시간에 맨 앞자리에 앉아 가장 모범적으로 요가동작을 따라 하던 사내의 눈에, 시범 동작을 하던 스님이 잠깐 새 앉은 자세 그대로 아무도 눈치 채지 못한 상태에서 거꾸로 튀어 올랐다가 천정을 찬 듯 제자리에 돌아와서 아무일도 없었던 것처럼 단정히 앉아 있는 모습이 창가에 얼핏 스친 달그림자처럼 기이했던 게 아마 눈에 띤 전부였을 것이다.     
 
 아무튼 스님은 요가를 배우겠다고 불문곡직 찾아든 사내를 제 식구 맞이하듯 반겼다. 그리하여 사내는 몇 달을 그런 식으로 주말이면 절집을 제집드나들듯하며 요가를 수련했고, 그것도 모자라 나중엔 아예 스님의 권유로 석달열흘을 그 속에 들어가 살았다.
 
 야트막한 봉두산의 중턱에 옴팍하게 자리를 튼 제석사는 풍수를 모르는 이의 눈으로도 마치 봉황의 알자리 같은 곳이라는 걸 한눈에 보아 알 수 있다. 원래 대웅전으로 썼던 낡은 구 한옥 건물이 한 채 맨 윗자리를 차지하고 있는데, 지금은 주인과 손님들의 공양간(식당)으로 쓰이고 있었다. 이 본채를 바라보고 왼쪽으로 제법 웅장한 한옥식 선방이 한 채, 오른쪽으로 볼품없는 조립식 건물의 법당이 한 채, 그리고 마당 아래쪽으로 손님들이 묵어가는 멋들어진 한옥 요사채가 하나, 이렇게 도합 네 채의 건물이 그런대로 잘 어울린 듯 구색을 갖추고 있었다. 사내가 배정을 받아 백일간의 절간 생활을 경험하게 된 곳도 바로 이 요사채였다.
 
 새벽 예불이 4시에 있고 3시 반이면 종각의 새벽종이 울린다. 여기 사는 대중이라야 주지스님과 정업보살, 준홍이 그리고 준식이와 사내, 이렇게 다섯 명이 전부이고, 주말의 경우에나 간혹 손님이라도 찾아들 때면 여분의 몫이 더해진다. 새벽종이 길게 울리면 그 종소리에 맞춰 일어나고 활동하는 것이 절집생활의 기본이 된다. 종은 물론 이미 터줏대감 노릇을 단단히 하고 있는 준홍이 담당이다. 절간 생활이 처음인 사내는 꽤 긴장된 모습이다. 평소답지 않게 부지런히 움직거린다. 일어나자마자 새벽예불에 올릴 물을 길어오고, 부처님 전에 향촛불을 켜둔다. 유독 깔끔한 스님의 성미를 맞춰대는 것이 어쩌면 사내의 긴장을 더하게 하는 일일지도 몰랐다. 주지스님은 사내가 보기에 아무것도 아닌 일에 까다롭게 군다. 성냥꼬투리 하나도 함부로 흘려선 안 된다.

 

새벽예불.jpg » 새벽예불


 
 군대생활에 잔밥 수가 말해주듯 절집도 절밥수가 말해준다. 사내는 처음 이곳에 들어올 때까지만 해도 요가행에 집중해서 수행이나 하다가 나오겠거니 했다. 예상은 처음부터 빗나갔다. 들어온 지 얼마 안 돼서 공양주(밥해주는 사람)가 없어졌다. 워낙 까다로운 주지스님의 처사를 못 견디는 절집 처자들이 붙어있을 재간이 없었을 것이다. 하여튼 주방일이 사내를 포함한 남정네들 차지가 되고 보니 예기치 못했던 잔일에 들이는 시간이 늘게 됐다.
 
 텃밭에 나있는 고수나 상추, 쑥갓, 열무 등이 산중 살림의 주된 찬거리가 된다.  이 고수가 독특하다. 나중에 중국에 가서 안 사실이지만 고수는 중국인들이 향채로 매우 즐겨먹는 채소중의 하나다. 사내에겐 절간의 생활 곳곳의 경험만큼 이 고수의 독특한 향미가 낯설었다. 하지만 몇 번의 경험으로도 나중엔 이 특별한 맛과 향취를 사랑할 지경이 되고 말았으니, 인간의 입맛이란 참으로 간사하기 그지없다. 산중 절간의 생활도 그렇게 몸에 익어갔을 것이다.
 
 그렇게 새벽예불과 오전 기도, 그리고 저녁예불이 산중의 공식적인 일과가 된다. 그 사이사이를 이용해서 공양을 한다. 해서, 아침은 6시, 점심은 11시 반, 저녁은 5시가 대체로 정해진 공양시간이다.     
 
 절집에 와서 절밥을 먹으며 절 생활을 해보는 것은, 그 정해진 규칙과 예의범절과 독특한 주지스님의 까다로움을 감내할 수만 있다면, 한번 도전해 볼 만한 나름의 묘미가 있다. 요가란 게 앞으로 뒤로 옆으로 벌리고 찢고 굽히고 젖히고 꺾고 하는 동작만 있는 게 아니다. 사찰에서 종교적 의식 속에 포함되어 기본적으로 하는 절수행도 따로 한맛이다. 사내는 절 동작의 마디마디에 호흡을 배합하여 앉았다 일어서는 동작을 반복하는 108배를 요가 수행의 한가지로 여기고 열심을 내었다. 새벽부터 저녁까지 하루 평균 500배 이상을 하는 것만으로도 운동량이 상당하였기 때문이다.   

 

108배 이미지.jpg » 108배
 
 그리고 요가로 말하면 사내가 원래 목적하던 바였다. 사내의 자존심으론 인도의 본판에 유학을 갈 궁리까지 한때 했던 터였기 때문에, 그 차선책으로 절집에 들어온 소이가 바로 그 요가수행에 있을 수밖에 없었다. 새벽예불이 끝나고 법당에 홀로 남아 고요히 요가 아사나(요가의 동작과 자세)를 수행하는 시간, 사내는 자신의 몸이라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절절하게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나의 몸과 생각이라는 것은 무엇인가, 에 골똘히 사유하고 침잠되어 들어가니 사십남지기 인생길이 참으로 부질없고 허망하게 느껴진다. 이 한 몸이 뭐라고, 그토록 아귀다툼을 하고 살까, 한번 태어나면 늙어죽기를 기다리는 것이 인생이란 말인가, 산골짜기에 두고 온 그네와 두 딸들은 사내에게 무엇일까, 온갖 상념이 고개를 쳐든다.

 

글 민웅기(<태극권과 노자>저자,송계선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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