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경] 미나마타병은 살아 있다 지구환경

사상 최악 공해병 악명 떨친 `미나마타병'

수은관련 협약 이름을 `미나마타협약'으로

           
 최근 국제사회가 수은배출저감 협약을 맺으며, 협약의 이름을 미나마타수은협약(Minamata Convention on Mercury)이라고 지은 것을 계기로 미나마타병(水俣病)이 다시 주목을 끌고 있다. 협약 서명식은 10월 10일 구마모토현 미나마타시에서 열렸다. 이번 회의에는 약 140개 나라와 지역이 참가했는데 협약은 서명 90일 이후 발효된다. 협약의 주요 내용은 수은의 수출 규제, 배출 금지, 적절한 보관과 폐기 등을 규정하고 있으며, 특히 2018년까지 아세트알데하이드 제조 공정 때 미나마타병의 주범인 수은을 사용하는 것을 금지하고 있다.

 이에 앞서 과학저널 <사이언스>가 9월27일치에서 미나마타병의 어제와 오늘, 그리고 내일을 짚은 내용을 과학기술정보원 `미리안'이 번역 정리했다. 그 내용을 소개한다.

 일본 남부 해안지역인 미나마타시에서 발생한 미나마타병은 사상 최악의 공해병 중 하나로 악명 높은 질병이다. -미나마타병의 첫 희생자가 밝혀진 지 약 60년, 일본 정부가 “질소비료 공장에서 유출된 메틸수은이 미나마타병의 원인이다”라고 공식 인정한 지 45년이 지났다.
 그러나 일본 남부 해안지대 미나마타시의 주민들과 과학자들은 여전히 둘로 나뉘어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다.
 예컨대 이곳에는 두 개의 미나마타병 박물관이 세워져 있다. 하나는 일본 정부가 지원하는 공식 박물관이고, 다른 하나는 한 대학이 지원하는 비공식 박물관이다.
 두 진영은 표면적으로는 대립하고 있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우리는 다른 의견을 갖고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적은 아닙니다”라고 비공식 박물관을 운영하는 시민단체 중 하나인 미나카나병 본부(Minamata Disease Center)의 쿠니오 엔도 본부장은 말한다.


800px-Minamata_Disease_Museum.jpg » 미나마타병 박물관 전경. 위키미디어 코먼스.

  

대조적인 모습의 두 박물관

 

그러나 두 박물관의 스타일과 강조점은 분명히 다르다. 비공식 박물관은 미나마타 고지대의 좁은 길에 자리잡고 있으며, 허름한 양철지붕으로 덮여 있어 헛간을 방불케 한다. 냉방시설도 되어 있지 않아 여름날 박물관은 찜통이 된다. 반면 공식 박물관은 바닷가를 내려다 보는 언덕에 자리잡고 있다. 멋진 현대식 건물에 에어컨도 설치돼 있어 쾌적한 느낌을 준다.
 또한 공식 박물관의 번드르르한 디스플레이는 “미나마타병과 관련된 문제들은 이제 거의 해결되었다”는 일본 정부의 공식 입장을 암시하는 한편, 비공식 박물관의 초라하고 조잡한 디스플레이는 “비극의 진상은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는 환자와 시민단체의 입장을 암시한다.
 환자와 시민단체들이 제기하는 문제들은 증세가 경미한 수은중독 환자들을 진단하는 방법을 마련하고, 저농도 수은노출이나 초기(유아기 또는 청소년기)의 수은노출이 성인기 건강에 미치는 영향을 밝혀내라는 것이다. 두 진영은 미나마타병 희생자 수가 몇 명인지를 놓고서도 티격태격하고 있다. 희생자 집계는 고무줄 같아서 수천명에서 10만명 사이를 오락가락한다.
  
처음엔 전염병인 줄 알아

1956년 한해에 17명 숨져

 

(1) 분열의 역사
 
 미나마타 주민들의 분열은 미나마타병이 창궐하기 전부터 시작됐다. 1908년 칫소(窒素, 원래 명칭은 ‘신일본질소비료’)가 미나마타에 비료공장을 설립한 후, 제품을 점차 다각화해 다양한 화학제품들을 생산하기에 이르렀다. 1932년 칫소는 아세트알데히드를 만들기 시작했는데, 이것은 다양한 합성물질을 만드는 원료로 사용되었다. 그런데 아세트알데히드는 생산공정에서 황산수은을 촉매로 사용해, 독성물질인 메틸수은을 탄생시켰다. (메틸수은은 오늘날, 먹이사슬 안으로 침투하여 생선과 기타 동물의 체내에 축적됨으로써 뇌손상과 기형아를 초래하는 것으로 알려진 강력한 독성물질이다.)
 칫소가 번창하면서 미나마타시도 함께 번창했고, 이에 따라 미나마타시는 둘로 갈라졌다. 1950년대가 되자 마을 주민의 약 절반이 직간접적으로 칫소에 생계를 의존하게 되었지만, 다른 절반은 어업이나 농업 같은 전통적 방식으로 삶을 영위했다.
 그런데 1956년 봄과 여름, 미나마타만 주변 어촌마을에서 이상한 질병이 유행하기 시작했다. 환자들은 손과 발이 얼얼하고 걷거나 말하기가 힘들다고 호소했다. 증상이 심각한 환자들은 경련을 일으키다가 사망에 이르기도 했다.  국립미나마타병연구소에 의하면, 1956년에 확인된 환자는 54명인데, 그 중 17명이 그해에 숨졌다.
 1956년 말, 쿠마모토대 연구진은 “중금속에 오염된 물고기와 조개를 먹은 것이 질병의 원인일 것”이라는 심증을 굳히고, 바다를 오염시킨 주범으로 칫소를 지목했다. 그러나 칫소는 “처리되지 않은 폐수를 바다로 흘려보내지 않았다”며, 그후 몇년 동안 공장폐수 처리 자료를 공개하지 않고 버텼다. 나중에 밝혀진 사실이지만, 당시 칫소의 경영진은 자체적으로 실시한 조사보고서를 은폐하고 있었다. 그 보고서의 내용은 “미나마타에서 발생한 괴질은 공장폐수와 관련성이 있는 것으로 생각되므로, 이를 반박할 대항이론을 마련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주민들은 둘로 나뉘어, 한쪽은 칫소를 비난하고 다른 한쪽은 칫소를 두둔했다. 희생자들과 그 가족들은 다른 주민들로부터 따돌림을 받았다. 많은 주민들이 그 질병을 전염병으로 오해했기 때문이다.

 

수은 제거 못하는 폐수처리시스템

 

 1959년 어업계와 정부의 압력에 못이겨, 칫소는 폐수처리 시스템을 설치했다. 그러나 그것은 눈가리고 아웅에 불과했다. 2011년 일본 환경성이 발표한 보고서에 의하면, 폐수처리 시스템은 무용지물이었다. “칫소의 폐수처리 시스템은 애당초 수은을 제거하도록 설계되지 않았기 때문에, 메틸수은을 제거하는 데는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고 보고서는 밝혔다. 1959년 12월, 칫소는 (확인된) 희생자들과 어민들에게 보상을 하기로 약속했지만, 여전히 “미나마타병을 일으킨 원인은 공장폐수가 아니다”라는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그로부터 9년 동안, 칫소와 일본정부 및 미나마타시 당국은 미나마타병 문제가 일단락된 것으로 간주했다. 공무원들은 공장 폐쇄나 개보수가 미나마타의 경제에 영향을 미칠 것을 우려했다. 그래서 폐수 밸브는 열린 채로 방치됐고, 메틸수은은 여전히 바다로 흘러들어가 물고기와 조개의 조직 속에 축적되었다. 그 사이 수은은 해산물을 먹는 사람들의 몸속에서도 농축되었다. 그 중에는 임신부들도 있었는데, 수은은 태반에 축적되어 태아를 강력한 신경독소에 노출시켰다.

 

1968년에야 `공장폐수가 원인' 공식 인정


 1968년 5월 칫소는 마침내 아세트알데히드 생산을 중단했고, 이에 따라 수은 사용도 중단됐다. (문제의 공장은 지금도 존속하며, 다른 제품을 생산하고 있다.) 그해 말, 일본정부는 “미나마타병은 공장폐수에 오염된 해산물을 먹음으로써 발생했다”고 공식 인정했다. 그러나 일본 정부는 한걸음 더 나아가 “사태는 1960년에 종료됐다”고 선언했다. 그후 1970년대 초반에 이르기까지, 일본 정부는 “미나마타만에서 잡히는 (오염된) 해산물을 먹어도 괜찮다”고 강변하며, 해저의 침강물 속에 잔류하는 수은의 위험을 무시했다. 정부 당국자들은 1975년까지 미나마타만에서의 조업을 금지하지 않았고, 1997년 대규모 준설을 실시한 후에는 아예 조업을 허용했다. 그동안 시민단체들은 (불구가 되거나 몰골히 흉하게 된) 희생자들의 사진들을 공개하며 국제사회의 관심을 호소해 왔다. “일본 정부가 진작에 미나마타만의 해산물을 먹지 말도록 조처를 취했다면, 많은 희생자들을 예방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엔도 본부장은 말했다.

 
  800px-Minamata_Disease_Cenotaph.jpg » 미나마타병 희생자 위령탑. 위키미더 코먼스. 
 

까다롭기 이를 데 없는 환자 판정기준

 

(2) 도대체 누가 환자인가
  
 ‘수은노출의 정도’와 ‘미나마타병의 증상’에 대한 불확실성 때문에, “도대체 누가 환자인가?”라는 문제를 놓고 의학적·법적 논쟁이 치열하게 전개되고 있다.
 칫소가 수은 사용을 중단한 1968년 환자들과 시민단체는 미나마타병시민대책위원회를 만들어 희생자들의 보상을 지원하고 있다. 그후 45년 동안 협상, 중재, 판결, 행정조치, 내각의 결정, 그리고 두 번의 법률제정이 있었지만, 그 결과는 다양한 희생자 분류, 보상수준, 의료지원 등을 짜깁기한 누더기 대책이었다.
 예컨대, 1977년 일본 환경청이 제정한 엄격한 판정기준에 의거하여 전문가들이 선별한 미나마타병 희생자는 약 2260명이다. 이 기준을 충족시키려면, 환자는 한 번 이상 심각한 증상을 겪었어야 하고, 가장 오염이 심한 지역에 거주해야 하며, 1969년 이전에 태어났어야 한다. 모든 환자들은 16만~18만달러의 보상금(일시불)과 연금 및 의료지원을 받았다. 1995년 법률제정에 의해 1만1000명의 경증 환자들이 추가로 2만6000달러의 보상금과 의료지원을 받게 되었다. 그리고 2009년 일본의회는 또 하나의 법률을 제정해 좀 더 경미한 환자들을 지원하고 있다.
 그러나 지난 4월, 두 건의 대법원 판결이 나오면서 일본 정부와 희생자들을 술렁이게 하고 있다. 이 판결은 미나마타병 환자를 판별하는 기준(복수의 중증 증상을 나타내야 함)의 합법성을 문제삼으며, 관련 전문가위원회의 판정을 기각했다. 그동안 6만5000명의 환자들이 2009년 법에 의거하여 보상신청을 한 상태였다.

 

"환자 수 최대 10만명 이를 것" 추정

 

 “미나마타병 환자의 수는 최대 10만명일 거라고 믿는다”고 엔도 본부장은 말했다. “현행 미나마타병 판정 시스템의 문제점은 ‘수은에 노출된 지 수년 후에, 단편적으로 증상판별이 실시되었다’는 점이다. 또 하나의 문제점은 ‘생물학적으로 유해한 수준의 수은에 노출되더라도, 자각증상을 느끼지 못할 수 있다’는 점이다. ”
 “나는 다른 사람의 머리카락이나 셔츠를 촉감으로 구별할 수 없다. 찬물과 더운물도 구분하지 못한다“고 하지메 스기모토라는 환자(52·도쿄 거주)는 말했다. 이 환자는 미나마타 어민의 3대 후손으로, 조업이 금지되던 시기에 가끔씩 미나마타에 가서 물고기를 잡은 일이 있다고 한다. 그런데 그는 어린 시절 그게 정상인 것으로 알고 있었다고 한다.
 이런 침묵의 희생자들을 가려내기 위해, 시게루 타카오카(미나마타 교리츠 신경/재활클리닉 소속 의사)가 이끄는 조사팀이 구성되어, 활발한 활동을 벌이고 있다. 지난 7월 영국 에든버러에서 열린 ‘글로벌 오염물질(수은)에 관한 컨퍼런스’에서, 타카오카는 “시라누이해(Shiranui Sea) 연안에 거주하는 주민들 중 1000명 이상이 광범위한 메틸수은 중독 증상을 보이고 있다. 이들은 사진으로 알려진 미나마타병 환자들의 모습과는 다르지만, 미나마타병 환자임에 분명하다”고 보고했다(미나마타만은 시라누이 해안의 일부다).

Minamata_map_illustrating_Chisso_factory_effluent_routes_ko.png » 미나마타병 발생지. 위키미디어 코먼스.   

 

나이 들면서 새로운 증상 나타날 가능성 높아

 

(3) 장기적 관점
  
 보다 많은 사람들이 나이가 듦에 따라 미나마타병 증상을 나타내게 될 것으로 보인다. 그의 조사결과에 의하면, (지금껏 체계적인 대규모 연구가 실시된 적은 없지만) 미나마타병 환자들은 나이가 듦에 따라 새로운 증상을 나타내거나 기존의 증상이 악화된다고 한다.
 최근 체결된 미나마타 수은협약은 서명국들에게 “수은이 건강에 미치는 악영향을 이해하고 감시하라”고 강력히 요구하고 있지만, 비평가들은 “수은중독 증상은 서서히 진행되어 만년(晩年)에 나타나는 데다가 판별하기가 까다롭다”는 점을 들어 난색을 표명한다.
 일본 정부는 온갖 수단을 동원하여 이번 조약의 이름에 ‘미나마타’라는 이름이 들어가지 못하게 하려고 발버둥쳤지만, 이를 막지 못했다. 그러나 국제사회는 미나마타 주민들의 치욕스러운 마음을 헤아려야 할 것이다. 엔도 본부장에 의하면, 미나마타 주민의 90% 이상이 불치의 질병에 ‘미나마타’라는 이름이 들어간 것을 언짢게 생각한다고 하니 말이다.
  
출처
http://mirian.kisti.re.kr/futuremonitor/view.jsp?record_no=241548 
KISTI 미리안 『글로벌동향브리핑』 2013-10-09     
원문
http://www.sciencemag.org/content/341/6153/1446.summary

TAG

Leave Comments


profile한겨레신문 선임기자. 미래의 창을 여는 흥미롭고 유용한 정보 곳간. 오늘 속에서 미래의 씨앗을 찾고, 선호하는 미래를 생각해봅니다. 광고, 비속어, 욕설 등이 포함된 댓글 등은 사양합니다. 

Recent Trackbac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