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라도 너무 다른 시어머님표 산후조리 생생육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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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들은 흔히 임신 기간과 산후 조리 기간만큼은 정말이지 제대로 대접을 받아야 한다고 말한다.

그만큼 몸이 힘든 기간이고, 특별한 보살핌과 도움이 필요한 시기라는 뜻일 것이다.

특히 아이를 낳은 직후에는 절대 힘들지 않게 잘 쉬면서 몸을 회복시켜야 한다고 생각한다.

더구나 요즘 젊은 엄마들은 몸매에 대한 관심이 커서 트고 늘어진 뱃살을 돌려주는 맛사지와

다양한 미용 서비스가 인기라고 한다. 그러다보니 온갖 서비스가 제공되는 산후 조리원을 선호한다

그런곳에서 산모들은 갓 태어난 아기를 전문가에게 맡겨두고 여왕처럼 제공되는 온갖 서비스에

몸을 맡기며 편하게 지낸다.

몸이 편해야 하는거, 맞다. 그렇지만 마음도 편해야 한다. 나에게는 이게 더 중요하다.



 첫 아이를 조산원에서 낳았을때는 열흘간 그곳에서 조리까지 하고 나왔다.

내가 아이를 낳은 조산원은 모유 수유, 천 기저귀 사용, 그리고 남편의 육아 참여가 원칙이었다.

아기는 태어나자 마자 엄마 옆에 뉘어지고 남편과 함께 아이에게 젖 물리고 천 기저귀 갈면서

조산사들의 도움을 받아 부모 노릇을 배웠다.

젖이 뭉치기 시작할때 유방 맛사지를 받아서 젖 몸살도 크게 앓지 않고 수유를 시작했고, 육아

초기에 겪을 수 있는 많은 어려운 상황들을 수월하게 넘길 수 있었다.

그 열흘간 정말 행복했다.

규모가 크지 않은 조산원이라서 비슷하게 아이를 낳아 같이 지냈던 부부들과 친구처럼 가까왔고

친 언니나 친정엄마처럼 살뜰하게 도와주고 보살펴주는 조산사들이 있어 늘 든든하고 안심이

되어던 것도 좋았지만 밥이 정말 맛있었다. 미역국에 갖은 나물, 생선등으로 차려진 밥상은

늘 정갈하고 담백했다. 매일 매일 맛있게 먹으며 즐겁게 아이를 돌보았다.



열흘간의 조리가 끝나는 날 시어머님이 강릉에서 올라오셨다. 일주일간 뒷바라지를 해 주시러 오신 것이다.

먼 곳에 계셔서 자주 뵙지 못했던 어머님이 편할 리 없었지만 먼저 보신 두 며느리는 산후 뒷바라지를

해주셨다는데 나만 안 해줄 수 없다는 그 정성을 마다할 수 가 없었다.

평생을 강릉에서 살고 계시는 어머님은 전형적인 옛날 분이셨다.

햇볕이 뜨거운 7월초에 조산원을 나섰는데 어머님은 내게 긴 옷과 긴 바지를 입으라고 하셨다.

조산원에서 열흘 동안 시원하게 지냈던 아이는 긴 내의를 입혀서 싸개로 모두 감싼 다음 바람 한 점

스며들지 못하도록 당신이 품으로 꼭 품고 차에 타셨다.

그리고 부천의 조산원에서 산본의 집까지 오는 동안 에어컨은 커녕 창문도 못 열게 하셨다.

남편과 나, 어머님, 아이, 그리고 서울에 사는 시 이모님 딸까지 탄 차는 금새 한 여름의 열기에

묻혀 버렸다. 어머님은 온 몸을 구부려 아기를 감싼 이불을 품고 계셨는데 얼굴에서는 땀이 줄줄

흘러 내리고 있었다. 차 안은 사람들의 몸이 뿜어내는 열기와 바깥에서 데우는 열기로 한증막처럼

덥고 답답했다. 산본까지 오는 동안 정말이지 숨이 막힐것 같았다.

어머님과 같이 지낼 일주일이 암담해지는 순간이었다.



어머님은 집에 오시자마자 더운 밥을 새로 짓고 미역국을 끓여 작은 상에 받쳐서 아이와 내가

누워 있는 안방으로 가져오셨다. 그리고 삼신할머니께 절을 하고 빌기 시작하셨다.

그 절차가 끝나자 상위에 차렸던 고봉같은 밥과 대접 가득한 미역국을 산모가 다 먹어야 한다고

하셨다. 조산원에서 마악 점심을 먹고 출발했던 터라 배가 불렀던 나는 도저히 먹을 수 가 없었다.

게다가 어머님의 미역국은 내 입맛에 도저히 맞지 않았다. 어머님이 가져오신 동해산 미역은

몇 번을 씻어도 끈끈한 액이 나오는 자연산인데 그것을 그냥 맹물에 푹푹 끓이다가

조선 간장으로 슬쩍 간을 한 국이었기 때문이다. 비릿한 바다냄새가 그대로 담겨있는 그 미역국을

도저히 삼킬 수 가 없었다. 내가 좋아하는 미역국은 멸치나 조개로 맛을 낸 국물에 들기름으로 미역을

달달 볶다가 마늘을 넣고 간을 한 그런 국이었기 때문이다.

어머님의 정성은 고마왔지만 입에 맞지 않는 음식을 억지로 먹고 싶지는 않았다.

결국 어머님의 미역국은 일주일 내내 남편만 열심히 먹었다.

산모가 미역국을 먹지 않으니 어머님은 큰 걱정이셨다.



평생을 바닷가에서 옛방식대로 살아오신 어머님과 어려서부터 도시에서 자란 며느리는 달라도 너무 달랐다.

어머님은 모든 간을 조선 간장으로만 하셨다. 게다가 반찬도 별로 만드지 않으셨다.

그저 매일 밥과 미역국만 산더미처럼 해 놓으셨다. 산모는 밥과 미역국만 먹으면 된다고

여기시는 듯 했다. 그 미역국마저 입에 맞지 않으니 밥상앞에선 늘  밥만 입에 넣기 일쑤였다.

거의 맨 밥만 먹다시피 하고 일어서면 어머님을 걱정하시고 노여워 하셨다. 그래도 어쩔 수 없었다

. 어렵게 어렵게 계란 후라이를 좀 해달라고 부탁을 드렸더니 소금을 안 치고 그냥 해 오셨다.

감자를 볶아 달라고 했더니 조선 간장에 볶아 오셨다. 어느것이고 맛있게 먹을 수 가 없었다.

어머님은 창문을 못 열게 하시는 건 물론, 창가 가까이 가지도 못하게 하셨다. 현관도 안되고

냉장고도 열 수 없었다. 좁은 집안에서 아이를 안고 서성거릴 곳이 없었다. 조금이라도 찬 음식은

입에 대지 못하게 하셨고 긴 옷에 양말까지 신게 하셨다. 죽을 맛이었다.

첫 아이는 4킬로 넘게 태어난 큰 아기여서 유난히 기저귀를 많이 적셨다. 어떤 날은 하룻밤에만

스므개의 기저귀를 갈기도 했다. 자고 나면 머리맡에 젖은 기저귀가 수북했다. 어머님은 그걸

모두 손으로 빠셨다. 손으로 치대서 들통에 삶고 다시 헹구어 탈수만 세탁기를 쓰셨으니

목욕탕에서는 하루 종일 물소리가 끊이질 않았다. 연세도 많으신 분이 그렇게 힘들게 하시니

마음이 가시방석 같았다.

 

남편이 출근하면 꼭 감옥에 나 혼자 남겨진 기분이었다. 어머님은 어렵고 불편했고 어머님이

해주시는 밥은 입에 맞이 않으니 남편이 퇴근하기까지 긴 시간을 어머님과 함께 지내는게

아이를 낳는 것보다 더 힘들게 느껴졌다. 하루 하루가 얼마나 마음이 불편했던지

어머님 계신 일주일 동안 변을 보지 못했다.

마침내 일년보다 길게 느껴졌던 일주일이 지나고 어머님이 가시는 날, 구미에 사시는

형님에 가족이 아기를 보러 올라 오셨는데, 딸처럼 아끼시는 큰 며느리를 보신 어머님은

'산모가 미역국을 먹길 하나, 밥을 많이 먹기를 하나, 도대체 부실하게 먹으니 얼마나

미운지, 둘쨋날에 다시 대관령 넘어갈려다 말았다'며 그동안 내내 서운하고 노여우셨던

마음을 표현하셨다. 그 말을 듣고 몹시 송구스러웠지만 그렇게 표현을 해 주시는게 고마왔다.

그냥 꾹 참고 내려가셨다면 내 맘이 더 불편했을 것이다.

'어머님.. 죄송해요. 며느리가 많으니 이런 며느리도 있고 저런 며느리도 있다고 생각해주세요'

라며 나는 뒤늣게 애교를 부렸다.



어머님이 가시자 마음이 어찌나 편한지 기저귀를 빠는 것도 힘들지 않았다. 간섭받지 않고

내 맘대로 해 먹을 수 있다는 것이 자유를 얻은 것처럼 좋았다. 

나중에 형님하고 동서에게 물어보았더니 두 사람은 어머님이 조리해 주실때

해주시는 음식은 어떤 것이라도 맛있게 먹고 어머님이 하라는 대로 열심히 하셨단다.

두 며느리가 그렇게 했는데, 제일 늦게 본 며느리가 속을 제대로 썩여 드렸으니 마음 고생이

퍽이나 크셨으리라.  여자들이란 본래 부얶이 바뀌면 제대로 음식을 할 수 가 없는 법이다.

도시에서 사는 며느리 집에 오셔서 사방이 낮선 환경에서 손에 익지 않을 살림살이들로

음식을 해내고, 빨래를 하고, 집안일을 하셨으니 오죽이나 불편하고 답답하셨을까.

그런데도 며느리는 늘 불편한 표정으로 밥도 제대로 먹지 않았으니 단단히 미우셨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젖은 넘치게 나왔고, 아이는 건강하게 자랐다. 그나마 어머님께 지은 불효를

조금이나마 갚은 셈이다.



첫 애때 마음 고생을 단단히 하신 어머님은 집에서 낳은 둘째와 셋째는 조리 이야기를 꺼내지도 않으셨다.

나도 맘 편하게 친정엄마 모셔서 조리를 받았다.

지금이야 어머님이 오신다고 하셔도 그냥 솔직하게 내 입장과 생각을 말씀드릴 수 있지만 그때는

시골에 계신 시어머님이 너무 어려운, 철없는 며느리였다. 서로가 잘 몰랐고 어려웠으니 그토록

둘 다 맘 고생, 몸 고생하는 조리가 되 버렸다.

결혼해서 8년을 살며 세 아이를 낳는 동안 나와 어머님이 서로를 이해할 수 있는 역사도 깊어져서

이제는 그런 시행착오는 할 리 없지만 당신의 자손에 대한 지극한 애정과 정성만은 여전히

변함이 없음을 잘 안다.



나도 아들을 두었으니 이다음에 며느리를 보겠지만 시어머니가 해 주는 음식을 입에 맞지 않더라도

맛있게 먹어주는 며느리가 더 이쁘긴 하겠다. 하하.. 고부갈등 해결의 비결이 별건가.

입장을 바꾸어 보면 이해 못할게 없는데 말이다.



이젠 연세가 드시고 몸을 다치셔서 셋째 아이는 맘 대로 안아 보지도 못하시는 어머님..

고분고분하지도 않고, 시키는대로 잘 하지도 못하는 부족한 며느리지만 한결같이 품어주시는

그 사랑... 마음 깊이 감사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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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ofile집에서 아이를 낳고 키우는 경험이 주는 가치, 병원과 예방접종에 의존하지 않고 건강하게 아이를 키우는 일, 사교육에 의존하기보다는 아이와 더불어 세상을 배워가는 일을 소중하게 여기며 살고 있다. don3123@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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