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서 제일 겁난 며칠 생생육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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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석 연휴에 4박 5일을 강릉 시댁에서 보내고 돌아와서 꼬박 일주일간 제대로 몸살을 앓았다.

어느 정도 예고된 일이었다. 셋째를 낳은 후에 처음으로 가는 시댁이었는데, 아이 둘과 아이 셋은

정말 달랐다. 짐을 싸는 일부터 만만치 않았다.

추석에 이어 아버님 생신상까지 집에서 차려 손님들을 치르고 올라와서는 몇 군데 잡지사에

보내야 하는 원고들이 밀려 있어 이틀을 새벽까지 글을 써야 했으니 몸이 상하는 게 당연했다.

처음엔 늘 그렇듯이 목부터 아팠다.

따끔거리고, 음식을 삼킬 때 돌이 걸리는 것처럼 아프길래 겁이 나서 명주 수건을 목에 감고

자고, 뜨거운 물을 계속 마시고, 서암봉도 붙이고 했는데 이 정도로 회복될 상황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목의 통증이 어지간히 가라앉나 싶더니 온 몸이 덜덜 떨리고, 아프면서 기침이 나기 시작했다.

엎친데 덮친 격으로 남편은 3일간 지방 출장을 떠나 있는 상황이었고, 세 아이들 모두

강릉에 내려가기 전부터 감기 증상이 있었는데, 첫째와 막내의 기침이 줄지를 않아 몸과 마음을

쓰고 있던 참이었다.



아이들만 아니라면 이불 뒤집어 쓰고 한 이틀 땀 내며 푹 자면 지나갈 몸살이었다.

며칠만 살림 신경쓰지 않고 쉬면서 제때 더운 밥 먹고, 오래 오래 자고, 찬 바람 쐬지 않으면

해결될 일이었다. 그러나 여덟 살, 네 살, 한 살 이렇게 세 아이를 키우는 엄마인 내게 한 나절이라도

푹 쉰다는 것은 이미 불가능한 일 이었다. 게다가 남편이 집에 없으니 간단한 일 하나 부탁할

사람이 없었다.

가끔 힘들 때 도움을 받았던 친정 엄마도 관절염이 심해져 무릎 수술을 앞 두고 있었고, 네 명이나

있는 친정 자매들 모두 직장에 다니고 있어 딱히 누구를 부를 수도 없었다.

아픈 몸으로 막내 천기저귀 수발 드는 게 너무 힘들어서 이웃 엄마에게 얻어 두었던 종이 기저귀를

꺼내 채우고 집안일도 신경 쓰지 않았지만 그런다고 맘 놓고 쉴 수가 없으니 죽을 지경이었다.



아이를 낳고부터 내게 세상에서 제일 겁나는 일은 ‘내가 아픈 일’이 되버렸다.

아이가 아프거나, 남편이 아픈 것은 두번째다. 아이나 남편이 아프면 어떻하든 내가 돌보면

되지만 내가 아프면 무엇보다 아이들을 돌보는 일을 누구도 대신할 수 없기 때문이다.

아이에게 젖을 물리고 있을 때는 더 그랬다. 내가 아프다고 젖 먹는 아이를 굶길 수는 없는데

정말 크게 아파서 병원 약을 먹고 치료를 받느라 아이에게 젖을 물릴 수 없게 되는 일은

상상만 해도 끔찍했다. 내가 며칠이라도 입원을 하거나 일어날 수 없다고 생각하면 아이들은

어떻게 할 것인가. 애 키우는 엄마는 맘 놓고 아플 수도 없다. 정말 그렇다.

그래서 수지침도 배우고, 요가도 하고, 뜸도 뜨고, 나 혼자서 내 몸을 돌볼 수 있는 온갖

민간요법을 열심히 익혀 두었다. 몸이 크게 아프기 전에 그럭저럭 보살필 수 있도록 애를 쓰며

지내왔던 것이다. 그러나 늘 이런 방식만으로 내 몸을 지킬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무엇보다 늘 제대로 쉬지를 못하니 몸은 언제든 아플 수 있는 상황이었다.

그동안 크게 탈이 나지 않았던 것이 용했던 것뿐이지 이미 오랫동안 내 몸은 무리를 하고 있었다.



몸이 아플 때 제일 서러운 것은 내가 먹을 밥을 아픈 내가 직접 차려야 한다는 것이다.

아플 때는 누구나 편하게 누워 다른이의 보살핌을 받고 싶어진다. 나도 그렇다.

누군가 다른 사람이 나를 위해 더운밥과 따듯한 국을 끓여준다면 그것만 며칠 먹어도

일어날 것 같다. 그러나 누가 이런 일을 해 주겠는가.

엄마가 아프다고 해도 아이들은 별 동요가 없다. 엄마는 언제나 아침부터 밤 늦도록 움직이며

집안일을 해 내고, 자기들 먹을 밥을 차려주는 존재라는 생각은 아이들에겐 변함 없는

진실인 모양이다. 내가 일어나서 움직이는 한 아이들은 걱정하지 않는다.

몸은 힘들어 죽겠는데 큰 아이는 여전히 아침이면 늦잠에서 깨어나지 못해서 애를 태우고

둘째 아이는 하루 종일 수십권의 책을 들이밀며 읽어달라고 조르고, 막내는 저만 안고 있으라고

보채고 매달린다. 내가 제대로 먹지 못해도 아이들은 제때 밥을 차려 줘야 하고, 막내는

언제든 원할 때 양껏 젖을 빨아 먹는다. 내 품에 매달려 젖을 빨아대는 어린 것을 보고 있으면

가끔 무서워진다. 정말이지 내가 더 아프면 이 아이의 배는 누가 채워줄 수 있을까. 아이는

내 젖을 먹는 게 아니라, 엄마 자체를 삼켜대고 있는 것 같았다.

온통 내 손길과 보살핌에 의지하고 있는 아이들이 셋이나 있다는 사실이 새삼스레 두렵고

무서웠다. 아프면 안된다, 아프면 안된다. 그런데 이렇게 아프니 어쩌면 좋을까.



간신히 큰 아이를 학교에 보내 놓고 매달리는 둘째와 셋째 사이에서 쩔쩔 매다가 너무 힘들어

첫째인 필규 학교 친구 엄마들에게 도움을 청했다.

엄마 사정은 같은 엄마들이 안다고 당장 아이 하나 키우는 이웃 엄마가 달려와 윤정이를

종일 봐주겠다며 데려가더니 잠시 후에 냄비 하나 가득 따뜻한 닭죽을 끓여 왔다.

금방 끓인 더운 죽을 입에 넣으며 나는 펑펑 울었다.

내게 필요한 건 약이 아니였구나. 누군가 나를 위해 오래 오래 정성껏 만든 따뜻한 죽 한 그릇.

귀한 보살핌을 받고 돌봄을 받는다는 그 자체였으리라.

목이 메이게 고마왔고, 정말 맛있었다.



그날 오후 학교에서 돌아온 필규는 눈가가 빨갛게 젖어 있었다.

친구 엄마가 ‘오늘 엄마가 많이 아프니 우리 집에 가서 놀다가 저녁 먹고 가라’는 말을 듣고

내가 죽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엄마... 죽으면 안되요.’ 하면서 필규는 나를 와락 안으며 또 눈물을 흘렸다.

‘죽기는... 앞으로 60년은 짱짱하게 살꺼야, 걱정마.’ 했더니

‘안돼요, 100년, 아니 150년, 아니 아니 200년은 더 살아야 해요.’

내가 아프다고 할 때는 걱정이 안 되었다가 다른 사람 입을 통해 내가 아프다는 얘길 들으니

더럭 겁이 났던 모양이다. 나는 필규를 오래 안아 주었다.

그날 아들과 앞으로 200년을 더 살기로 약속했다.

그리고 이웃 엄마들이 선물한 한나절의 여유와  한 냄비의 닭죽을 먹고 그럭저럭 기운을 차렸다.



아프지 말아야지. 정말 아프지 말아야지.

세상에서 제일 겁나는 며칠을 보내면서 나는 몇 번이고 내게 이런 다짐을 했다.

정말 힘들 땐 어린 아들 눈에서 눈물 나지 않을 정도만 슬쩍 아프고 일어나야지.



엄마니까, 엄마라서

나는 많이 아파서도, 아플 수도 없는 사람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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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ofile집에서 아이를 낳고 키우는 경험이 주는 가치, 병원과 예방접종에 의존하지 않고 건강하게 아이를 키우는 일, 사교육에 의존하기보다는 아이와 더불어 세상을 배워가는 일을 소중하게 여기며 살고 있다. don3123@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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