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는 ‘전천후 종합 예능인’ 생생육아

a83b75e11704711e39705d98246bcc2a.                                              (필규, 윤정, 이룸 2010년 8월)



# 장면 1

‘아니카, 아니카 어디 있어?’

주방에서 설걷이하고 있는데 윤정이가 날 부르는 소리가 난다.

맞다. 지금 ‘말괄량이 삐삐’ 놀이 하고 있다고 했지?

‘삐삐, 나 여기 있어. 왜?’

‘아니카, 내가 멋진 그림을 그렸어. 빨리 와 봐’

에효... 설걷이 좀 끝마쳤으면 좋겠구만... 툴툴거리며 아이들방으로 뛰어 간다.



# 장면 2

침대 위에서 이룸이 젖 물려 재우고 있는데 살금 살금 윤정이가 들어오더니

‘티모시, 언제 올꺼야? 친구들이 모두 기다리고 있다구...’

아... 좀 전부터 ‘티모시와 친구들’ 놀이로 바뀌었었지?

‘음...플렉스(누군지는 모른다. 윤정이가 저는 플렉스라고 해서 이렇게 부를 뿐...)

나, 동생 좀 재우고 갈께’

‘숲속 유치원 버스가 금방 올꺼야. 얼른 재우고 와?’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손짓으로 오케이 사인을 보낸다.



#장면 3

요즘 새로 시작한 ‘유아 발레’에 심취해 있는 윤정.

제가 좋아하는 음악을 틀어 놓고 윤정이표 발레 공연에 들어간다.

‘엄마, 엄마도 빨리 해야지요’

발레복에 발레 슈즈까지 신고 춤에 취해 있는 윤정이 앞에서 나는 이룸이를 안고

펄럭거리며 춤추는 시늉을 한다.

‘엄마, 따라해 보세요? 포잇, 알렉스. 이렇게 발을 세우구요, 다시 한 번’

나는 이룸이 안고 마루를 서너 바퀴 돌다가 가스불 끄러 달려간다.

‘엄마, 이젠 앉아서 하는 거 할 시간이예요.빨리 앉아요’

아이고머니...



애 낳으면 정말 별거 다 하게 된다.

내 취향이 아니건, 내 스타일에 안 맞건, 유치하고 우습건 상관없다.

애가 원하고, 애가 좋아하면 하게 된다. 더구나 나처럼 직장에 안 가고 종일 아이랑 같이 있는

엄마라면 종일 아이가 원하는 놀이를 같이 하면서 지낼 수밖에 없다.

늦게 결혼해서 첫 아이를 얻었을 때는 이런 것도 즐겁고 벅찼었다.

서른 예닐곱 나이에 파워레인저 가면을 쓰고 칼싸움을 하고, 보자기 둘러 쓰고 수퍼맨이 되고

조막만한 원목 기차 들고 ‘칙칙 폭폭’ 소리 내면서 레일 위에서 기차 놀이를 하고

이불로 참호를 만들고 베개로 폭탄을 던지며 전쟁놀이를 할 수 있는 것는 엄마가 되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서너 살 아이의 에너지란 종일 차고 넘치는 것이어서 기사 놀이 했다가, 우주 전사 되었다가

블럭 쌓았다가, 다시 칼 싸움을 하고, 놀이터 한바퀴 돌고와서 목욕탕에서 잠수함 놀이를 한다.

그때마다 상대는 엄마다.

첫 아이 필규는 지금까지도 역할 놀이를 너무나 좋아한다.

제가 재미있게 읽은 책은 꼭 역할 놀이를 해야 직성이 풀린다. 그러다보니 프랑스 만화 ‘땡땡’,

영국의 ‘아서왕과 원탁의 기사들’, ‘파워레인저’, ‘지크프리트와 오데뜨’, ‘해리포터 시리즈’,

등등 필규가 좋아했던 캐릭터들을 놀이로 하느라고 내가 섭렵한 역할들을 늘어 놓으면 백 명은

족히 넘으리라.

주인공은 언제나 필규가 하고, 나는 그 외 모든 등장인물을 맡아야 하는데 컨디션 좋을 때 하면야

재미도 있고 즐겁지만, 한번 꽂히면 수없이 하고 또 하는 아들을 상대하다 보면

마침내는 머리에서 김이 폴폴 나고 뚜껑이 열리는 경지에 이르게 된다.

‘이젠, 힘들어서 그만 할래!’를 외치면

‘엄마 미워!’하며 소리를 지르는 아들이었다. 수십 번을 놀아줘도, 한 번 제 뜻을 안 따라주면

그동안 열심히 놀아준걸 다 잊어버리고 엄마를 원망하며 울고 불고 난리를 쳐대니, 이럴 땐 정말

억울하기 그지 없다. 그러나 어쩌랴. 어른이 아이랑 싸워봤자 소용 없으니 다시 성질을 가라앉히고

‘그러면 딱 한번만 더 하고 쉬는 거야?’ 하는 수밖에...



필규는 놀이를 한 번 시작하면 몇 시간이고 그 역할에 빠져 있곤 했는데

반찬을 만들면서도

‘왕자님, 이번 파티에는 누가 오시나요?’ 어쩌고 하며 대사를 읊어대야 하고, 빨래를 하면서도

‘엄마, 빨리 ‘너희는 어느 나라에서 왔냐’고 해야지요’ 하는 아들의 재촉을 받아야 하고

심지어는 화장실에 앉아 힘을 주고 있는 상태에서도 ‘왕자님, 저를 빨리 구해주세요’ 하며

상대를 해주어야 했으니, 나도 참 고달픈 시절을 보내야 했다.

7년 간을 전천후 예능인으로 살다가 마침내 여덟살이 된 아들이 초등학교에 입학하게 되었을 땐

야호!, 하며 속으로 쾌재를 불렀지만 아뿔싸... 아들보다 말이 더 빠르고 영악한 둘째가 네살이

되면서 본격적으로 역할놀이에 몰두하기 시작했다.

둘째는 딸이어서 시장놀이, 병원놀이, 학교놀이, 엄마놀이, 전화놀이... 이런 것들을 좋아 한다.

아무 때나 불쑥 나타나서

‘여보세요, 엄마 전화 받으셔야지요. 제가 지금 전화 하잖아요’ 한다.

돌아보면 손에 작은 아기책을 반으로 펴서 전화기인 양 귀에 대고 있다.

‘아, 네 여보세요’ 나도 맞장구를 치며 주방벽에 걸려있던 채칼을 귀에 대었더니

‘엄마, 그건 전화가 아니잖아요’ 정색을 한다.

‘그래? 그럼 뭐가 전화인데?’

‘옆에 걸려 있는 나무 주걱이 전화라구요’

이런... 저는 아무거나 손에 들면 전화가 되고 나는 전화로 쓸 수 있는게 따로 정해져 있다니...

속으로 궁시렁거리며 나무 주걱들고 전화 받는 시늉을 한다.

딸애는 이런 놀이를 아주 좋아한다.

한가지 역할에 빠지면 몇 시간이고 그것만 하는 아들과 달리, 딸 아이는 놀이가 자주 바뀐다.

설거지 하면서 삐삐 친구 아니카를 하다가, 빨래 널고 와서

‘삐삐, 빨래 개는 것 좀 도와줄래?’ 하면

‘엄마, 나는 삐삐 아니거든요?’ 하며 화를 낸다.

‘그럼 뭔데?’

‘우리 아기 재우고 있다구요. 이게 내 아기구요’ 하며 품에 안고 있던 곰돌이를 가리키는 식이다.

덕분에 나는 하루에도 수차례 재빨리 이 역할에서 저 역할로 널 뛰듯 옮겨다녀야 한다.

이렇게 있다가 필규가 집에 와서 저랑 놀아달라고 하면, 팔로는 필규와 딱지를 쳐 가며

입으로는 윤정이의 유치원 친구가 되어주는 놀라운 멀티 기능을 발휘하는 엄마가 된다.

두가지 역할을 동시에 하면서 막내 기저귀도 갈아주고, 얼러주고, 안고 돌아다니기도 한다.

한번에 세가지, 네가지 역할을 동시에 소화하는 것이다.



아이가 하나였다면 이런 짓도 몇 해만 하면 졸업이었겠지만, 아이가 셋에, 그것도

한살, 네살, 여덟살로 드믄 드믄 낳은 탓에 종합 예능인을 졸업하려면 아직도 까마득하다.

큰 놈이 어지간히 엄마와 노는 일에서 떨어져 나갈 즈음이면 둘째가 한창일 것이고

쏜살같이 따라 잡는 셋째가 있으니, 몇 년은 또 두 딸들과 함께 소꿉놀이 하느라 정신 없겠다.

어림잡아도 40대의 대부분은 종합 예능인으로 살아갈 것 같다.

일찍 결혼한 친구들은 슬슬 갱년기니, 권태기니 어쩌고 하는 모양인데 그런 게 다 무어람.

갱년기도, 권태기도 내겐 그림의 떡이다. 50살이 되어도 막내가 열 살일테니 적어도

환갑까지는 숨 쉴 틈 없이 지나가리라.



그래도 좋다.

어린 아이랑 많은 시간을 보낼수록 치매도 덜 걸리고, 뇌도 덜 쇠퇴한다던데, 나는 늦게 결혼해서

줄줄이 애를 셋이나 낳았으니 그야말로 머리를 쉴 사이 없이 계속 굴려가며 살게 생겼다.

아침엔 공주였다가, 점심엔 전사가 되고, 저녁엔 토끼 엄마하다가, 잠자리에선 마녀가 된들

어떠랴. 아이들이랑 키득거리며 그림책의 주인공이 되어 마음껏 어려질 수 있는 것도 내 복이다.

더이상 엄마랑 놀아주지 않을 때가 왔다고 서운해하기 전에, 아이들이 나를 원하고, 나를 찾고

내게 기대하고, 매달릴 때 이 한몸 불살라 화끈하게 놀아주는 거다.



환갑까지 ‘전천후 종합 예능인’으로서 젊음을 불태우리라.

으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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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ofile집에서 아이를 낳고 키우는 경험이 주는 가치, 병원과 예방접종에 의존하지 않고 건강하게 아이를 키우는 일, 사교육에 의존하기보다는 아이와 더불어 세상을 배워가는 일을 소중하게 여기며 살고 있다. don3123@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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