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계를 보지 않는 자유, 느린 휴가 양 기자의 육아의 재발견



4bd7ac281b569849853538a4c24c33be. » 내가 만든 가지버섯호박볶음. 맛은 제법 만족스러웠다. photo by 양선아




핸드폰은 집 구석 어딘가에 시체처럼 널부러져 있다. 오전 7시가 됐든, 8시가 됐든, 9시가 됐든 저절로 눈이 떠지는 시간에 일어난다. 그날 아침 기분에 따라 아침 메뉴를 결정하고, 하루 스케줄을 정한다. (남편은 반드시 아침을 먹어야 하는 사람은 아니다. 여름 휴가 기간 동안 내가 아침을 해주면 먹고, 아니면 그냥 출근한다.) 오늘 아침 메뉴는 어제 책과 인터넷 사이트에서 보고 찜해놨던 가지호박버섯볶음과 된장국 그리고 달걀 오믈렛.

 

잡곡밥으로 밥을 하고, 요리 레서피를 참고하며 없는 요리 실력을 발휘해본다. 음~. 처음 해보는 가지호박버섯볶음은 들기름 냄새가 고소하니 제법 맛이 나고, 다시마 육수를 우려내고 감자를 송송 썰어넣은 된장국은 그 어느때보다도 맛있다. 요리를 하고 있는 새, 남편과 아이가 잠을 깨 주변이 소란스럽다. 딸은 실컷 잠을 자고 일어나 엄마에게 “엄마, 안아줘요” “엄마, 이리와요”라며 어리광을 부린다. 여름 휴가 기간, 바쁠 것없는 나는 잠깐 요리를 멈추고 방에 가 아침에 눈뜬 아이를 반갑게 맞는다.

 




“우리 민지, 잘 잤어요? 엄마가 안아줘요? 당근 안아줘야지~ 민지야~ 엄마가 뭐하고 있게? 민지 주려고 맛있는 거 만들고 있지~” 라고 말한다. 내 품에 꼭 안긴 딸은 행복한 미소를 지으며 엄마와 눈을 맞춘다. 그리고 뭘 만들고 있는지, 뭘 먹고 싶은지 미주알고주알 아침부터 종알거린다.






7d69e9584aef2c1fcb3e2ad69671bec4. » 신나게 그네 타는 딸. 요즘 하루종일 랄랄라 노래를 흥얼거린다. photo by 양선아




요새 딸 기분은 최고다.




아침에 울며 징징거리지도 않고, 하루종일 ‘랄랄라~”하며 노래를 흥얼거린다.




항상 아침에 바쁘고 정신없었던 엄마가, 밤늦은 시간까지 얼굴을 못보던 엄마가, 자신이 원하는 때 자신이 원하는 일을 마구 해주니 얼마나 좋겠는가. 또 하루종일 자신과 함께 온전한 시간을 보내니 얼마나 행복하겠는가.

 

월요일부터 시작된 여름 휴가.




아이를 봐주시는 이모님이 이번주 꼭 쉬고 싶어한데다, 남편은 여름 휴가도 없이 일을 해야한다고 하고, 만삭인 내가 선택할 수 있는 여름 휴가는 말 그대로 ‘집에서 그냥 쉬는 것’이다. 휴가 직전 건강면 기사로 ‘쉼’에 대한 기사를 쓰면서도, 이번 휴가는 정말 ‘느리게 보내리라’ 다짐했다.

(http://babytree.hani.co.kr/archives/8168)




텔레비전이나 휴대폰, 인터넷, 신문 등도 최소화하고, 틈틈이 명상을 하면서 몸과 마음을 이완시키고, 그동안 아이와 함께 하지 못한 것들을 여유있게 하겠다고 생각했다. 느릿느릿 욕심내지 않고 아이의 상태와 내 컨디션에 따라 그날 그날 하고 싶은 것을 하겠다 생각했다.




무계획으로 일관하겠다는 자세로 휴가를 맞았다. 아이가 놀이터에 나가고 싶어하면 놀이터에 나가 놀고, 자고 싶으면 자고, 뭐든지 시간에 쫓기지 않고 해보겠다 생각했다.

 




철이 어느정도 들기 시작하면서 난 시간에 대한 강박관념으로 살아왔다. 항상 뭔가를 계획하지 않고서는 불안감을 떨쳐버릴 수가 없었다. 한달 계획, 1년 계획, 5년 계획, 10년 계획, 그리고 인생 계획 등을 정리해야 직성이 풀렸고, 그리고 그런 계획들을 반드시 계획한대로 실천해야만 한다는 강박관념으로 살았다.




치열한 경쟁 사회에서 그렇게 똑똑하지도 않고 가진 것도 없는 내가 살아남으려면 ‘열심히 살아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있었던 것이다. <성공하는 사람들의 7가지 습관> <시간 관리 잘하는 법>과 같은 류의 자기계발서를 읽으면서, 스스로가 좀 게을러진다 싶으면 스스로를 채찍질했다. 직장에 들어온 뒤로는 휴가도 철저하게 계획을 세워 보냈다. 휴가 기간에도 뭔가 의미를 찾으려 했었고, 남들에게 어디 다녀왔다라는 것을 과시할 수 있는 계획을 세웠던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이런 강박관념을 언젠가부터 버리려 노력하고 있다. 그 계기 중 하나는 20대 말 많이 아파 회사에 병가를 내고 내가 계획했던 모든 일들에서 한발 물러나면서부터고, 또 다른 하나는 결혼을 하고 애를 낳고 키우면서부터다. 이 두 계기를 통해 난 ‘시간’이라는 자원을 분배하는 기준을 기존과는 다르게 설정하게 됐다.




아프기 전 그리고 애를 낳기 전, 난 시간을 분배하고 계획하는 데 있어 항상 ‘나’만을 위해 그리고 ‘나’의 성취가 항상 우선순위였다. 나란 어떤 존재인가, 나는 어떤 기자여야 하는가, 나는 어떻게 살고 싶은가 등을 생각하며 내 꿈, 내 일, 내 인생, 나의 성공 위주가 머릿속을 가득 메웠다. 휴가 기간도 이런 생각들의 연장선상에서 계획됐다.




그런데 한번 ‘세게’ 아프고 나서 그리고 내가 한 아이의 엄마가 된 뒤부터, 그것만이 결코 행복의 기준이 될 수 없겠구나라는 사실을 깨닫게 됐다. 나 뿐만 아니라 나와 관계 맺고 있는 사람들과의 함께 하는 시간 그리고 자연과 함께 하는 시간, 그리고 그냥 아무것도 하지 않고 머리를 텅 비우거나 ‘무’ 상태로 돌아갈 수 있는 시간들도 필요하고 그런 시간들도 내 계획에 포함돼 있어야 함을 알게 됐다. 그리고 내 몸을 돌볼 시간, 딸을 비롯한 가족이나 내게 있어 중요한 사람과 공감하고 의미없더라도 함께 할 시간도 적절하게 배분해야 행복할 수 있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꼈다. 아이가 생긴 뒤부터는 아이와 눈을 맞추고 대화하는 시간, 아이의 섬세한 변화를 느끼는 순간순간이 얼마나 경이로운지 알게 됐다. 부쩍 크고 있는 딸의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아이의 매 순간순간을 내가 놓쳐버리면 정말 중요한 걸 놓칠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3e89ab7924afcf762de0b6d4e0beb8fd.시계를 보지 않고 생활을 하는데, 하루라는 시간은 정말 눈 깜짝할 새 지나간다. 벌써 휴가 막바지를 향해 달려가고 있다.




아이를 위해 음식을 하고, 아이와 놀이터에서 놀고, 아이와 낮잠을 자고 또 그동안 바빠 못 만났던 사람들을 만나고, 틈틈이 방도 닦고 빨래도 하면 어느새 밤이다. 시간에 쫓기지 않고 생활하니 아이가 떼를 써도, 아이가 울어도 평소처럼 짜증이 나거나 힘들지 않는다. 길을 가다 아이가 의자에 앉고 싶어하면 앉고, 꽃을 보고 싶어하면 본다. 집안일을 하다가도 아이가 원하면 집안일을 놓고 아이와 놀고 안아준다. 밤 10시가 넘었는데도 아이가 잠들지 않고 종알거려도 짜증내지 않는다. 아이의 모든 것을 여유롭게 수용하게 되니, 아이의 표정과 행동은 더 밝고 명랑하고 천진난만하기만 하다. 나 역시 마음은 호수처럼 평화롭고, 그냥 순간순간이 행복하다고 느낀다.

 




<느리게 산다는 것의 의미>로 널리 알려진 피에르 쌍소는 <게으름의 즐거움>이라는 책에서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저마다 사회라는 극장 또는 무대의 배우다. 우리는 때때로 휴식이, 다시 말해 쉬는 것이 필요하다. 그렇지 않다면, 공연은 주변 사람들을 지치게 할 것이고, 우리 스스로도 지치게 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휴식 시간이나 여가 시간이 있어도, 이를테면 일요일에도 계속 움직인다. 심지어 평일보다 더 열중해서 움직이기도 한다. .....(중략)....... 말하자면, 게으르다는 것은 있는 그대로 내버려 둔다는 것이다. 그것은 슬기로움이나 너그러움의 한 형태다. 물러났다가 세상으로 다시 돌아아와야 한다. 이러한 삶의 방식은 한가로이 거닐기, 남의 말 들어주기, 꿈꾸기, 글쓰기 따위처럼 사람들이 별로 소중하게 여기지 않는 버려진 순간에 깃들여 있다.

존재의 아름다운 순간을 함부로 다뤄어서는 안된다. 그 순간은 놀라움의 순간이다. 느꺼움의 순간이다. 여전히 살아 숨쉬는 순간이고, 당신의 말에 진지하게 귀 기울이는 한 사람과 마주하고 있는 순간이다. 웃음을 띤 채 거의 아무것도 하지 않는 그러한 순간이다. 그럴 때 우리는 다만 눈길 줄 가치가 있는 것을, 그리고 차츰 뚜렷하게 윤곽이 드러나는 것을 지켜볼 따름이다. 이와 같은 인식 행위에는 시간을 멎게 하는 힘이 있다. 삶은 처음부터 끝까지 가 볼 가치가 있다. 때로는 빠르게, 때로는 느리게, 처음부터 끝까지 살아볼 가치가 있다.”

 

워킹맘의 휴가. 산으로 바다로 유명 관광지로 해외로 아이와 함께 가족과 함께 떠나는 것도 좋겠지만, 시간에 대한 강박관념을 버리고 아이와 게으름의 즐거움을 만끽해보는 것은 어떨까.




느릿느릿, 천천히, 여유롭게 단 일주일만일도 온전하게 아이와 함께 하는 시간을 보내는 것, 그것만으로도 아이에게 본인에게 충분한 휴식이 될 듯 하다. 물론 아이와 함께 하는 시간이 너무 힘들어 어서 출근하고 싶다고 호소하고 싶어하는 워킹맘도 분명히 있을 것이다. 그러나 생각의 틀을 조금만 바꾸면, 그리고 좀 더 마음의 여유를 갖는다면, 아이와의 온전한 휴식을 기꺼이 느껍게 즐길 수 있지 않을까?

 

양선아 기자anmadang@hani.co.kr






75d1cf31b019b47ae7571b44ff8708d4. » 한겨레 자료사진 photo by 곽윤섭 기자






































TAG

Leave Comments


profile알듯말듯한 육아에 대해 함께 알아가고 고민합니다. 불안한 육아가 아닌 행복한 육아를 꿈꿉니다. 몸과 마음이 건강한 삶을 지향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