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난아기의 도타움으로 돌아간다 무위태극선 교실

민웅기의 무위태극선 39/큰 모습을 잡다/십자수 十字手

 

 

여봉사폐로부터 두 손이 모아져서 왼쪽 간 방향의 가슴 앞에서 십자수를 이룬다. 왼발에 체중이 실려 있어 왼발이 실하고, 반보 뒤에 놓인 오른발이 허하다. 눈은 가슴 앞에 십자수를 이룬 두 손의 사이에 둔다.

십자수十字手는 두 손이 열십자를 이루어 장심이 가슴 앞을 향하고 있 그 모양을 형용하는 말이다. 기세로부터 초식을 전개하여 106식에 이르는 동안 허리(丹田)를 중심으로 두 손의 수궁手宮과 두 발의 족궁足宮의 오궁五宮이 조화와 균형을 이루면서, 온갖 형상과 기세를 펼쳐왔던 바, 이제 십자수로 완결된다. 십자수十字手로 투로가 완결되어 마지막 초식인 수세收勢로 정돈이 되면 108식의 대장정이 마감된다.

십자수 1.JPG   

마치 파란 많은 인생역정을 보는 것 같다. 무극無極에서 태극太極의 일기一氣가 일어나고 그 일기 안에서 음양 이기二氣가 생하여 나옴으로써 태극선의 투로가 전개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 음양 이기는 음중양, 음중음, 양중양, 양중음의 사상四象으로, 그리고 더 세분하여 팔괘八卦, 64괘로 변화하여 만물의 가지각색의 물상을 형상形象화하고 그 기세氣勢를 드러낸다. 양 이기는 강, , 합을 형식과 내용으로 하여 천변만화하는데, 그것이 마치 인생의 파노라마를 연출하는 것 같다.

 

어린 시절과 청년 시절, 그리고 중년 시절과 노년 시절의 인생 사계四季를 두루 살아오면서 각각의 계절을 지나고, 수많은 고비를 넘고 넘으면서 깨달음의 계단을 오르듯, 인생의 계단을 한 단계 두 단계 오르는 것과 같다. 단계를 오를 때마다 의식이 진화하고 성숙되는 바, 매 단계마다 아래 단계를 내포하면서 넘어서고 그리하여 다음 단계로 진입해 올라선다. 역시 마찬가지로 그 단계를 내포하면서 다시 넘어선다. 그러기를 반복한다.

그리하여 108식 무위태극선의 투로를 한 차례 행공하는 것은 인생의 사계를 두루 통과하고 경험하는 것을 의미하게 된다. 이렇게 깨달음의 길로 비유된 무위태극선108식 투로를 행공함으로써, 우리는 나날이 행복하고 깨달음이 더해지는 것을 경험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하여 참된 지혜를 얻음으로써, 우리 앞에 다가서는 삶에 대한 이해의 폭과 깊이를 더해갈 수 있을 것이다. 해석이 좋아야 한다. 더 좋은 해석, 더 깊이 있는 해석, 더 고상한 해석이 우리의 삶을 참된 행복의 문으로 안내할 것이기 때문이다.

십자수十字手는 태극에서 음양으로, 양에서 사상으로, 사상에서 팔괘로, 그리고 만물로 분화되고 발전되어 나온 형상과 기세를 역행하여, 다시 거두어들이는 것을 뜻한다. 그러므로 만물의 다양한 물상으로부터 64괘로, 8괘로 4상으로, 양 이기로, 태극으로 돌이켜 수렴해오는 것을 뜻하게 된다.

강호로 출행했던 행보를 돌이켜 고향집으로 돌아옴이다. 숱한 난관과 시련을 경험하고 배우고 난 후의 노련한 노년의 인생에서 풍기는 여유로움과 같다. 새로운 일과 새로운 사업과 새로운 사람으로 떠났던 여정을 돌이켜 본디 자리로 되돌아옴이다.

 

양의 이법을 따라 출렁거렸던 몸과 마음을 정돈해 태극의 원만함으로 돌아왔다. 나누어진 두 손과 두 발이 합해져서 열십자의 손을 이루었다. 십자수는 종과 횡, 음과 양, 좌와 우, 공간과 시간, 삶과 죽음으로 나누어져 있던 이분법적 세계를 넘어서서 불이不二와 중도中道, 태극太極의 경계로 들어섬이다. 욕망과 알음알이의 세계로 흩어진 정기를 회복하여 갓난아기의 도타움으로 돌아옴이다.

 

움직임 가운데 고요함을 추구하네.”

몸과 마음은 둘이 아니라네.”

 

動中求靜 동중구정

心身不二 심신불이 (태극구결)

 

동중구정動中求靜은 태극선의 핵심적인 원리를 잘 설명해준다. 태극선은 기세로부터 출발하여 한 순간도 움직임이 그치지 않고 끊임없이 돌아간다. 마치 장강의 대해가 출렁거리듯이, 달팽이가 지나간 흔적과도 같이 나선형의 부채꼴 모양을 그리며 춤추듯 돌고 돌아간다. 태극선에서 움직임()원심력遠心力의 작용에서 보듯 바깥쪽의 방향으로 흩어지듯 한다. 태극선은 처음부터 끝까지 움직임의 연속으로 이루어져있기 때문에, 밖으로 향해 뛰쳐나가는 원심력의 작용의 지배를 받는다. 음양이론으로 말하면 양의 원리라 할 수 있다. 양은 바깥쪽으로 돌고 열려있고, 움직이고, 그래서 에너지를 순환시키고, 강하고, 실함을 주된 특징으로 한다.

그런데 이렇게 원심력을 중심으로 바깥으로 향해서 돌아가는 운동의 한가운데에는 안으로 끌어당김으로써 원의 중심이 흐트러지지 않도록 잡아주는 힘의 원리가 동시에 작동하는데, 이른바 구심력求心力이다. 이 구심력이 없다면 밖으로 흩어지는 힘의 작용에 의해서 필연적으로 운동은 흩어지게 되고, 그렇게 되면 운동은 더 이상 지속될 수 없게 될 것이다. 지구가 자전과 공전을 계속함에도 흐트러지지 않고 지속될 수 있는 원리가 이 구심력의 작용에 있는 것처럼, 태극선도 끊임없이 바깥쪽으로 부채꼴 모양의 원을 그리며 돌아가는 가운데, 그 중심을 잃지 않도록 안의 축으로 끌어당기는 힘의 원리가 작용하고 있는 바, 바로 이 구심력이다. 이것은 음의 원리이다. 음은 안으로 모아들이고, 닫혀있고, 고요하고, 그래서 에너지를 쌓고, 부드럽고, 함을 주된 특징으로 한다.

 

이렇게 음과 양, 움직임과 고요함의 상호 대립적인 원리에 의해 태극선이 이루어지지만, 태극선의 쓰임()의 측면에서 말하면 동을 본위로 하여 정을 추구함을 요결로 삼는다. ‘동중구정動中求靜이 된다. 태극선은 쉴 새 없이 움직이나() 매 순간 순간 움직이지 않음()을 추구한다는 뜻이다. 그 쓰임()을 위해서 움직이고 돌고 순환하나, 그 본체()를 잃지 않으려는 끝없는 과정이 태극선의 원리에 담겨있다. ‘움직임()’의 근원은 고요함()’에 있다. 그러므로 돌고 돌아가지만 늘 고요함을 향해 되돌아간다. 만일 고요함을 잃게 된다면 그것은 근원을 잃는 것이 된다. 그 움직임의 중심을 놓치는 것이 된다. 그러므로 순환하나 도의 지도리(道樞)를 놓치지 않고 늘 그 중심으로 되돌아오는 나선형의 운동, 이것이 동중구정動中求靜의 원리를 내함한 태극선의 가장 큰 특징이라 말할 수 있다.

 

그런데 다시 생각해보면, 이라는 것과 정이라는 것도 다 환상에 불과한 것이다. 동 아닌 정 없고, 정 아닌 동도 없다. 인생은 나면서부터 쉴 새가 없다. 가만히 들여다보라. 갓난아기가 새근새근 잠들어있는 모습을. 가만히 누워있는 것처럼 보이나 그렇지도 않다. 배를 벌렁거리며 숨을 쉰다. 하품을 한다. 한 찰나도 움직이지 않음이 없다. 그러므로 우리가 동정을 논한다고 해서, 그것들이 별개로 존재하는 독립적인 현상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다만 상대적인 이름일 뿐이다. 그리고 이 상대적 개념의 동과 정도 알고 보면, 서로가 서로의 원인과 결과 됨이 겹겹이 쌓여있다. 움직임이 원인이 되어 고요함이 결과 되고, 그 고요함이 다시 원인이 되어 움직임이 일어난다. 이렇게 인과가 서로의 속 깊은 곳에 사무쳐서 상호침투와 상호전화를 되풀이하게 된다. 동 즉 정이 되고 정 즉 동이 된다. 다시 말해 동정불이動靜不二가 된다.

 

심신불이心身不二는 구결 중 내외합일內外合一의 의미와 상통한다. 그러나 꼭 같은 것은 아니다. 내외합일이 안의 생명과 바깥 생명간의 합일의 기운을 주로 말한다면, 심신불이는 한 생명체 안에서 몸과 마음의 합일을 말하는 뜻이 된다.

 

도교의 생명관은 기를 위주로 한 (), , (마음)의 삼위일체의 생명관이라 할 수 있다. 촛불에 비유하면 촛대는 정이고 심지는 기며 불꽃은 신이다. 이 세 가지는 본래 하나로서 나눌 수 없는 생명현상을 세 가지 측면으로 접근해서 이해하는 방식일 따름이다.

 

불교의 관점을 대표하는 것이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이다. 일체는 오로지 마음이 만들어낸 것이라는 관점이다. 그러나 이 마음은 일체만물을 반영하고, 일체만물은 마음을 드러내는 것이니, 이 마음은 우주 법계 자체를 표현하고 담아내는 말이 된다.

 

생명체 안에서 몸과 마음은 분리될 수 있는 어떤 것이 아니다. 마음은 몸을 집으로 삼고 몸을 통해서 스스로를 나투고, 몸은 마음의 인도함을 받아 그 쓰임을 다한다. 마치 물결이 물을 떠나 출렁거릴 수 없고, 물이 물결을 떠나 작용할 수 없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몸과 마음이 둘이 아님을 역설하는 말이 심신불이心身不二. 태극선의 행공의 원리는 바로 이 심신불이의 사상 속에 잘 녹아있다. 몸과 마음을 통일체로 보는 사상(形神合一)과 그 행공법이 태극선에 담겨있음이다.

노자는 모양이 없는 모양, 큰 모양의 도를 붙잡고 있으니, 천하가 움직여 나온다고 한다. 그 천하는 움직여 나오지만 아무런 해도 끼치지 않는다. 도는 다만 편안()하고, 평등()하고, () 뿐이다.

 

큰 모습을 잡고 있으면

천하가 움직인다.

움직여도

해를 끼치지 않나니

편안하고

평등하고

크다.

아름다운 음악과 맛있는 음식은

지나가는 손을 멈추게 하지만,

도가 사람의 입에서 나오는 것은

도무지 담담하여 맛이 없다.

보아도 다 볼 수 없고,

들어도 다 들을 수 없고,

써도 다 쓸 수 없다.

 

執大象, 天下往, 집대상 천하왕

往而不害, , , . 왕이불해 안, ,

樂與餌, 過客止. 악여이 과객지

道之出口, 淡乎其無味. 도지출구 담호기무미

視之不足見, 시지부족견

聽之不足聞, 청지부족문

用之不足旣. 용지부족이 (35)

십자수 2.JPG   

인생의 길을 가는 나그네가 큰길에 들어섰다. 꼬불한 길, 울퉁한 길, 막힌 길, 산길, 들길, 물길, 불길, 땅길, 하늘 길, 즐거운 길, 슬픈 길, 가는 길, 굵고 도타운 길 등, 천리만리 돌고 돌아온 길에 합류한 길이다. 아래로 나있어 모든 길을 낳아주고 자라게 해주고 모양을 내주고 기세를 이뤄주고 받아주고 이어주고 안아주고 통해주고 신령하게 해주고 비워주고 채워주고 인도해주고 비춰주는 한길은 크다(). ‘크고 작음을 넘어서니 참된 이 된다. 그래서 억지로 이름하여 라 부른다. 그런데 도는 너무 커서 모양이 없다. 헤아릴 수 없는 것을 형용하게 되니 큰 모양(大象)’이다. 다시 말해 모양 없는 모양(無象之象)’이 된다.

 

큰길에 들어서서 큰마음 안에 가만히 앉아있다(執大象). 이 다가온다. 하늘 아래 만물이 다가와 나의 마음의 문을 두드린다(天下往). 고요히 앉아 응대하니 천하가 나를 해롭게 하지 않는다(往而不害). 큰 모양은 자기 자신을 규정하고 고집하는 어떤 모양도 없다. 그러니 여러 물상들이 도전해오나 거절하거나 사양하지 않는다. 그들의 각양각색, 형형색색의 모양을 자신의 모양으로 삼으니 충돌할 것이 없다. 충돌함이 없이 다 받아들이니 해로울 것이 있을 수 없다. 큰 모양은 그 안에 온갖 모양을 다 포함할 수 있어 큰 모양(大象)이 된다.

 

부딪칠 일이 없으니 편안하다. 집착할 대상이 없으니 편안하게 된다. 만물을 고르게 대하니 평등하다. 이것저것 차별하지 않으니 마음에 걸림도 없다. 그래서 크다. 온 우주의 마음을 붙들고 있으니 편안하고(), 평등하고(), 크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아름다운 음악()이 들리면 귀가 쫑긋하여 걸음을 멈춘다. 향긋하고 맛깔나는 냄새()가 코를 자극하면 길 가던 손도 코를 벌름거리며 걸음을 멈춘다(過客止). 그런데 큰 모양의 도는 도무지 아무 맛이 없다. 지나가는 발걸음을 멈추도록 유혹할 만한 화려한 모양이나 빛깔도 없고 맛도 없다. 도무지 사리사욕을 부추기거나 충족시켜주지 않는다. 출세를 시켜주는 것도 아니고 명예를 높여주는 것도 아니고, 재산을 축적하고 쾌락을 즐기도록 부채질하지도 않는다. 도를 말하나(道之出口) 맛이 전혀 없으니 길 가던 이들이 들으려고 하지 않는다. 담담하여 맛이 없으니 말이다(淡乎其無味).

 

큰 모습의 도는 눈을 즐겁게 할 만한 볼거리가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러므로 보기에 족하지도 않다(視之不足見). 감미로운 음악처럼 들을 만한 것도 아니다. 그러므로 듣기에 족하지도 않다(聽之不足聞). 그러나 그 쓰임새는 무궁무진하다(用之不足旣). 크기에 어느 것 하나 도의 품을 벗어날 수조차 없다. 커다란 우주공간의 일에서부터 작은 미물들의 세계에 이르기까지 도의 조화, 도의 균형, 도의 자연을 떠나서 존재할 수 없다. 도의 그물망은 너르디 너르기 때문이다(天網恢恢. 73).

 

하루를 한평생으로 사는 곤충이 하루살이다. 한 해를 사는 풀이 한해살이다. 한 평생을 사는 것이 인생살이다. 산다는 것은 무엇일까? 그리고 죽는다는 것은 또 무엇을 말할까? 하루를 사는 하루살이는 저녁이 되면 그들의 황혼기를 맞을 것이다. 한 해를 사는 한해살이풀은 겨울이 다가오면 일생을 마친다. 100년을 사는 인생살이는 늙어지면 생을 마감할 준비를 한다. 모든 생명체는 태어나서 이름을 갖고 살다가 죽으면 그 이름을 반납하고 돌아가게 된다. 그래서 한밤중과 한겨울과 노년의 황혼은 생과 멸의 갈림길이 된다. 이름 없는 어머니의 품으로 돌아가게 된다. 인생의 겨울에 직면해 우리는 삶과 죽음을 어떻게 바라볼까?

 

우리는 태어남과 죽음이란 한번 정해지면 돌이킬 수 없는 고정된 어떤 것으로 여기는 것 같다. 그리고 태어남이 있고 난 후에는 반드시 죽음이 따르는 것을 당연한 법칙으로 여기는 것 같다. 또한 삶과 죽음은 별개의 상호 대립적인 과정이라고 여기는 것 같다. 그러므로 삶은 죽음과 대립하고 투쟁하는 과정으로 여겨지고, 죽음이란 우리가 퇴치하고 몰아내야 할 삶의 장애물로 그려진다. 죽음이 생명에 반하는 장애나, 혹은 생명의 끝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생성하면 소멸하는 것이 자연의 이치다. 태어나면 반드시 죽게 되고, 일어나면 반드시 사라지기 마련이다. 변화란 생멸하기 때문에 일어난다. 생멸이 없다면 변화도 없게 될 것이다. 그런데 한번 생각해보자. 생성과 소멸이 서로 독립적인 실체가 있고, 서로 상관없는 별개의 존재인가? 그렇다면 어떻게 태어남이 죽음이 되고 죽음 후에 태어남이 있게 되는가? 만일 생성과 소멸이 서로 상관없는 전혀 별개의 것이라면, 생성은 영원히 생성이어야 하고 소멸은 영원히 변치 않는 소멸이어야 한다.

 

그런데 하늘 아래에는 그렇게 고정불변의 존재는 없다. 태어나면 죽게 되고 죽으면 다시 태어남이 있는 것이 하늘 아래의 이법이고 일상이다. 만약 생성함이 소멸함으로 바뀔 수 있기 위해서는 반드시 생성함 그 자체에 소멸함의 원인을 내포하고 있어야 하고, 소멸함이 생성함으로 바뀌기 위해서는 소멸함 그 내부에 반드시 생성함의 원인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그런 까닭으로 생성함이 원인이 되어 소멸함이 발생하고 그리고 이 소멸함이 원인이 되어 생성함의 결과가 발생한다.

 

그런데 생성과 소멸의 인과因果는 그렇게 단선적으로 일어나지 않는다. 온우주는 화엄경의 인드라망과 같이 겹겹이 쌓여 다함이 없는 중층적이고 복합적인 인연의 관계망으로 이루어져 있다. 따라서 생멸의 인과도 중중무진重重無盡하게 된다. 제석천의 등불이 인드라망의 그물코에 걸려있는 이쪽 보석에 비추면, 그 보석의 불빛은 다시 다른 방향에 있는 저쪽 보석에 되비치게 된다. 각각의 그물코에 걸려있는 보석들은 서로 그렇게 비추고 되비치고 다시 되먹이는 현상이 겹겹이 쌓임으로써 불빛의 중층적이고 복합적인 인과관계(重重無盡緣起)를 이루는 것처럼, 생성함과 소멸함도 그렇게 겹겹이 쌓여 무궁무진한 인과因果관계 속에 서로 사무쳐있게 된다. 다시 말하면 생성함과 소멸함이 서로에게서 분리된 어떤 독립된 실체로서 존재하지 않고, 오로지 서로를 통해 원인이 되고 결과가 됨으로써 자신을 이루어가는, 동일한 현상의 분리할 수 없는 양 측면일 뿐이라는 것이다.

 

양 측면일 뿐만 아니라, 동시에 일어나는 현상이다. 생성함과 소멸함은 어떤 존재 안에서, 혹은 그 존재의 과정 속에서 지금 동시적으로 일어나고 있는 사건이다. 보기를 들어보자. 요즘 들어 특히 여성들이 관심을 갖고 있는 피부의 세포를 들여다보자. 신진대사新陳代謝가 일어난다. 이 신진대사가 일어나지 않으면 그 피부는 죽은 것이다. 그런데 신진대사란 무엇인가?

우리 인체는 에너지의 흐름이 막힘없이 조화롭게 순환이 될 때 건강한 생명이 유지된다. 구체적으로 말해서 이 에너지의 흐름은 세포 내부에서 일어나는데, 세포가 필요로 하는 새로운 에너지를 공급하고, 다 쓰고 남은 불필요한 에너지를 밖으로 배출하는 것을 신진대사라 한다. 이를테면 세포에 산소와 영양소를 공급하고, 이산화탄소와 세포의 찌꺼기들을 청소하여 밖으로 내보내는 일이 그것이다. 그리고 피부는 이 신진대사 과정을 거쳐서 죽은 세포와 새로운 세포를 교체하게 된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의 분별된 인식 속에서 세포라는 것이 고정된 어떤 실체로서 존재하고, 그리고 그 세포의 생성과 소멸이 항상 일정한 순서에 따라서, 그리고 독립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는 데 있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 않다. 세포라는 것도 중중무진重重無盡한 연기緣起의 법칙에 따라 끊임없이 변화하는 생명현상의 한 부분이며 과정일 뿐이고, 고정불변의 독립된 어떤 실체가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세포 안에서 일어나고 있는 생성과 소멸은 일정한 순서를 정해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고, 시차를 나눌 수 없는 동시적인 사건이라는 것이다. 동시다발적인 현상이어서 어느 것이 먼저 일어나고 어느 것이 나중에 일어난 것인지 구별될 수 있지 않다.

 

다만 생성과 소멸, 태어남과 죽음은 서로를 통해서 자신을 실현해나가는 한 가지 현상의 두 얼굴일 뿐이라는 것이다. 죽음이 없으면 태어남도 없고 태어남이 없으면 죽음도 없게 된다. 생명현상 안에서 생과 멸의 새끼 꼬기 현상이 존재할 뿐이다. 새끼 꼬기처럼 서로가 서로에게 갈마들어간다. 삶속에 죽음이 있고 죽음 속에 삶이 있다. 삶은 죽음 속으로 들어가서 죽음이 되고, 죽음은 삶속으로 들어와서 삶이 된다. 동시에 삶은 죽음 속으로 들어가서 삶이 되고, 죽음은 삶속으로 들어와서 죽음이 된다.

 

그리고 이러한 설명도, 다만 우리의 인식작용에 의해 같은 현상을 두 가지의 서로 다른 측면들로 분리 추출함으로써 얻어진 언어쓰기에 불과한 것이므로, 태어남이라든가 죽음이라든가 하는 것은 실상의 세계에서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생명의 연속된 흐름만이 존재할 뿐이다.

뿐만 아니라, 이러한 생명의 흐름도 낱낱의 생명들 안에서 자기완결적으로 일어나는 과정이 아니다. 낱낱 생명들의 생멸의 흐름이 서로 인연이 되어, 그 인과가 온생명 안에서 겹겹이 쌓여 무궁무진하다(重重無盡). 열 개의 방향으로 거울이 걸린 공간(十方世界)에서 빛이 비췬다. 이리 비취고 저리 되비친다. 하늘의 해와 달과 별, 은하계의 끝없이 펼쳐진 무한한 우주공간에서, 서로가 빛을 비추고 반사하고 되비친다. 이쪽의 원인이 저쪽의 결과를 일으키고, 저쪽의 결과가 다시 원인이 되어 이쪽과 또 다른 쪽으로 되먹임된다. 그렇게 낱낱의 생명들은 서로의 속 깊이 사무쳐 들어가는 인연의 법을 따라 온생명의 흐름 속으로 빨려 들어가게 된다.

 

한 톨의 낟알, 한 포기의 풀, 한 사람의 생각이 온우주를 담고 있다. 온우주가 합력하여 한 의식을 만들어 이루고, 한 의식이 온우주를 떠받든다. 낱낱의 생명들의 삶과 죽음은 그러므로 온우주적 사건이 된다. 하늘에 기록되는 태극의 춤사위처럼

 

민웅기(<태극권과 노자>저자,송계선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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