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의 그물은 크고도 너르다 무위태극선 교실

민웅기의 무위태극선 26/하늘의 망은 너르고 너르다/옥녀천사 玉女穿梭  

 

일각장천에서 이어져나오는 식이 옥녀천사玉女穿梭이다. 옥녀玉女는 선녀仙女와 같은 뜻으로 쓰이는 말이니 원래 도를 닦는 여인을 일컬어 부르는 말이나, 일반적으로 아리따운 여인을 지칭해서 쓰인다. 천사穿梭는 베틀의 북을 오가는 여인의 몸동작이 빠르고 신속함을 형용하는 말로 하늘을 뚫어가는 손동작의 아름다운 모양을 빗대서 붙여진 이름이다. 하여 옥녀천사는 아리따운 선녀가 하늘을 우러러 두 손으로 머리를 빗어넘기는 것과 같이 아름답고 우아한 동작을 연출하는 초식이다.

 

옥녀천사는 각각 네 개의 사이 방향으로 움직여 나온다. 두 발은 궁보로 좌식의 경우, 왼발을 굽히고 오른발이 펴있으며, 왼손이 왼쪽 이마 위쪽에 손바닥이 하늘을 향해 있고, 오른손이 가슴 앞 정면에서 약간 올라온 상태로 장심이 바깥쪽을 향해 있다.

우식은 반대의 모양이며, 좌식에서 우식을 반복하며 네 방향으로 옮겨가면서 초식을 행한다. 옥녀천사는 동작이 매우 크고 우아하며 아름답다. 그러나 허리의 선전 운동과 조응하여 나오는 두 손과 두 발의 동작이 원만히 대칭과 협조를 이루어 나오지 않으면, 매우 산만하게 되거나 균형을 잃기 십상이다. 특히 하체의 힘이 넉넉히 받쳐주지 않으면 동작의 흐름이 원만하게 되지 않는다. 따라서 동작의 원만한 흐름을 익히고 숙달하는데 상당한 기간의 정련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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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녀천사는 신선의 도를 닦는 아리따운 선녀가 머리를 빗어올리듯이 두 손을 밀어올리는데, 그 모습이 수려하고 그 기운은 하늘을 찌른다. 하늘을 꿰뚫는 것처럼 보이는 손동작은 하늘 기운을 맞아들이는 의미를 갖는다. 어떻게 하늘 기운을 맞아들이는가? 하늘을 향한 사랑과 헌신의 마음이 그것을 가능하게 한다. 하늘을 향한 순결한 믿음이 그 사랑과 헌신을 불러일으킨다. 나를 비우고 하늘과 하나됨으로써, 하늘의 기운을 맞아들이게 되는 것이다.

 

선녀가 자세를 바꾸고 동작을 전환할 때마다 밖의 기운이 회오리바람처럼 돌고, 선녀의 내부의 안 기운도 함께 조응함으로써 전신의 기맥이 열리어돈다. 안팎의 기운의 조화가 매우 순조롭게 되면, 선녀가 꿰뚫고자 하는 하늘 기운이 드디어 열리고, 선녀는 하늘이 된다. 하늘 기운을 타고 나는 선녀의 기세는 매우 조화롭고 화해롭다. 그러므로 밖의 기운 혹은 밖의 사람들과 충돌하거나 다투지 않는다.

마치 나비가 꽃으로부터 꿀을 취하고, 꽃이 나비의 도움으로 암수의 합환을 이루어내듯이, 옥녀천사의 기세는 사방의 화평을 구하는데서 찾는다. 하늘 나는 새들이 합창을 하고, 숲의 바람이 나무들의 소식을 실어나르는 전령사가 되듯, 옥녀천사는 뭇 생명들과 사람들의 살림과 평화와 행복을 실어나르는 전령사가 된다. 춤을 추듯 노래하듯 봄의 아지랑이가 살랑거리는 것처럼, 가을의 단풍잎들이 울긋불긋 방긋거리며 나부끼는 것처럼, 옥녀천사의 미소는 온누리에 그 아름다움을 흩뿌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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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십대 중반에 시골생활을 시작했다. 귀농이란 말조차 생소했던 때라 아는 이들의 눈총이 따가왔을 것이다. 시대와 역행한다고 생각했을 것이므로 나의 귀촌, 혹은 귀농은 애초부터 누군가로부터 공감을 받기도 힘들었을 터이다.

 

시골 들어오기 전에 일했던 사회단체에서 생활협동운동(생협)을 만들고 운영해본 경험을 살려, 산골생활 첫 해에는 이것저것 가축들을 키우는 일과 농작물을 재배하는 일들을 시도해보았다. 벼농사는 별도로 하고도, 감자, , , 율무, 고구마, 고추, 수박, 참외, , 배추, 참깨 등 텃밭에다 가꾼 작물의 종류만 해도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았다.

그중에는 잘된 것도 있었다. 고구마는 퇴비 기운을 받았던지 덩치 큰 호박만한 것들도 열렸고, 감자는 북을 잘해준 덕분으로 굵직하게 밑이 들었다. 그리고 고추농사는 자연농법으로 한답시고, 조금 연구를 해서 일절 화학비료나 농약을 쓰지 않고 지었다. 게으르기도 하려니와 비닐멀칭이 갖는 몇 가지 문제점을 피할 겸 해서, 통볏짚을 땅바닥에 깔아 보습과 통기의 효과를 높이는 볏짚 멀칭을 시도했는데, 그런대로 첫 농사치곤 제법 잘 되었다. 고추농사로만 보면 성공한 셈이었다.

 

벼농사가 문제였다. 벼농사는 제초가 관건이라는 마을 사람들의 말을 귀담아서, 먼 곳까지 가서 우렁이를 구해왔는데, 하필 그 우렁이들이 말썽이었다. 용병으로 투입된 우렁이들이 게걸스러운 식성으로 풀들을 먹어치워줄 것이라는 나의 기대와는 달리, 웬일인지 논바닥의 풀들은 줄어들 기미가 없다. 논두렁을 서성거리던 나의 눈에 실망스런 장면들이 목격되기 시작했다. ! 이놈들이 날이면 날마다 짝짓기만 일삼고 있질 않는가.

 

누가 말했었다. 농사는 풀과의 전쟁이라고. 풀에 대한 아무리 좋은 사상을 갖고 있다하더라도 논바닥에 그득히 올라오는 잡초들을 보고 있노라면 웬수가 따로 없다. 몇날 며칠을 논 가운데 파고 살면서 피와 무논의 잡초들을 뽑아내는 데 사력을 다했다. 아침 이른 시간에 논에 들어가면 샛거리는 커녕 점심조차도 제때에 먹기 힘들었다. 그렇게 나름대로 고생해서 지은 쌀농사는 이웃 논들에 비하면 차마 부끄러워 얼굴을 못 들 지경이었다. 수확이랄 것도 없었다. 다른 사람들의 반의반도 안 되었다. 겨우 우리 식구 먹을 정도의 쌀만 건졌다. 그런데도 행복했다.

산양을 구해서 젖을 짜먹기로 했다. 매우 낭만적인 일로 여기고 처음엔 하루에 두 번 씩, 나중에는 하루에 한 번 씩 저녁시간이 되면 규칙적으로 젖을 짜내었다. 맛이 담백하고 진해서 아이들이 잘 먹겠거니 했는데 그렇지도 않았다. 그래서 결국 그 산양 키우는 일도 다른 사람에게 넘겨주고 말았다.

 

토종닭들과 개, 흑염소들이 새벽부터 저녁까지 소란하니 산골생활도 따라서 분주했다. 한 해 두 해가 그렇게 즐겁고 낭만적으로 지나가고 있었다. 그럭저럭 산골에서의 이력이 쌓이고, 그러다 보니 유기농에 대한 강의 요청이 들어오기도 했는데, 그때의 일이다. 나의 강의가 끝나고 이어서 천적농법에 대한 슬라이드 상영이 있었는데, 거기에 매우 충격적이고 인상 깊은 내용이 담겨있었다.

세밀한 내용은 잘 기억나지 않지만 인상 깊은 대강은 이러했다. 제초제와 농약을 쓰지 않고서 병충해를 이기는 방법에 대한 교육이라 귀가 솔깃해서 들었다. 이를테면 이런 것이다. 채소를 갉아먹는 해충이 발생하면 그 해충에 대한 천적을 투입한다. 그러면 그 천적으로 투입된 곤충은 상대 해충의 몸에 침을 놓아서 알을 깐다. 천적의 알은 상대 해충의 몸속에서 깨어서 자라나는데 급기야는 그 해충의 몸 전체를 자양 삼아 다 먹고 자라게 되고, 그렇게 되니 자동으로 해충을 죽이게 된다.

! 저럴수가…… 감탄을 연발하다가 문득 이런 의문이 들었다. 그런데 그 해충들이 다 없어지고 난 다음에 그 천적의 앞날은 어떻게 되나? 당연히 그 천적마저도 의존해 살아갈 먹잇감이 없어지게 되므로 사라지고 말게 될 것이다.

 

인간의 눈에 해충이고, 익충이며, 천적이다. 그네들 입장에서 보면 다 한통속일 따름이다. 천적이 침을 놓아 상대 해충의 몸속에 까놓은 알들을 키워주는 건, 알고 보면 해충이다. 나중에 이 천적의 애벌레가 성장하면 아예 자기 몸까지 다 내어준다. 살신성인殺身成仁의 도가 된다. 만약 인간사회에서 이런 일들이 벌어졌다면 온 세상이 벌컥 뒤집어질 뉴스거리가 되었을 것이다. 누구의 몸이 누구의 몸인지 개념에 혼란이 온다. 다 그냥 한통속이라 해두자.

 

우리가 어떤 특정한 이해관계에서 취한 관점에서 보면 해충과 익충, 그리고 천적이 있다. 그러나 자연의 도는 그 자체가 온전하므로 더할 수도, 덜할 수도 없다. 그러한 관점에서 보면 우리의 분별심, 즉 해충과 익충을 나누고, 잡초와 작물을 나누는 식의 그러한 차별심은 근거 없는 환상이 된다.

 

이 환상에서 깨어나면 참길이 보이게 되는데, 그때 우리 눈앞에 펼쳐지는 세계는 여여如如한 실상實相의 세계가 된다. 그 실상의 세계 안에서는 유정무정의 존재가 서로 얽히고설키어 있다. 이렇게 얽히고설킨 채 상호 기대어있는 인연의 관계망을 노자는 천망天網이라 했다. 화엄의 세계관에서는 이를 말해 겹겹이 쌓여 다함이 없이 인연되어진 연기(重重無盡緣起)”라고 한다. 이 천망天網은 성긴 듯하나, 그 안의 어느 것 하나의 일탈도 허용하지 않는다. 그 자체로서 온전함을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이 곧 스스로 그러함, 自然이다.

하늘의 길은

다투지 아니하면서도 잘 이기고,

말하지 아니하면서도 잘 응하고,

부르지 아니하는데도 저절로 온다.

천천히 하면서도 잘 꾀한다.

하늘의 그물은 크고 또 너르다.

성글성글한데도 놓치는 것이 없다.

 

天之道, 천지도

不爭而善勝, 부쟁이선승

不言而善應, 불언이선응

不召而自來, 불소이자래

然而善謀, 선연이선모

天網恢恢, 천망회회

疏而不失 소이부실 (73)

우리가 살아가는 길은 늘 싸우는 길이다. 그런 길에 나가자, 싸우자, 이기자!”는 가장 친숙한 구호가 된다. 어떻게 이기는가? 보다 멀리, 보다 높이, 보다 빨리! 이긴다. 누구를 이겨야 하는가? 가까운 상대부터 지구상의 끝까지, 나와 이해를 달리하는 모든 경쟁자들을 이겨야 한다. 이 세상의 적이 단 하나라도 남아 있는 한 끝까지 싸워야 한다. 그러면 무엇을 위해서 싸워야 하는가?

 

사람들은 성공하기 위해서라고 말한다. 그러나 다시 왜 성공하고 싶은가?” 라고 물으면 입을 다물어 버린다. 할 말이 없다는 뜻이다.

 

어느 아파트 엘리베이터 안에 멋진 문구가 눈에 띄어서 정신이 번쩍 들었다. 거기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얼마나 빨리 가느냐보다 어느 방향으로 가느냐가 더 중요하다. **광고기획>

뒤의 광고회사의 글자만 없었다면 참으로 감동적이었을 것이다.

 

사람들은 성공하는 데는 동의하지만 성공이 무엇인가, 그리고 왜 성공을 해야 하는가 라는 물음에는 별로 대답할 준비가 안되어있는 것 같다. 그냥 먹고 살아야 되고, 남보다 더 잘 살아야 되고, 지면 도태되므로 죽기살기로 이겨야 되는 것, 그것이 인생이라고 대답하는 것 같다. 물론 행복하기 위해서 지금 이렇게 열심히 살지요.” “노후를 위해서 젊었을 때 더 고생해야 되지요.”라고도 한다. 그러나 참된 행복이 무엇이냐고 한 번 더 물으면 대답 대신 화를 낼지도 모른다.

 

노자가 말했다. “하늘의 길(天之道)은 다투지 아니하면서도 잘 이긴다(不爭而善勝).” 하늘의 도는 이기고 지고가 없다는 뜻이다. 승부의 세계가 없다는 뜻이다. 모두가 큰 길의 한 식구고 한통속이고, 한울타리이니, 그 안에 존재하는 작은 길들 간에 서로 싸울 대상도 이유도 없다는 뜻이 된다.

그렇게 되니 싸우지 않고도 모두가 승리한다. 승리한다는 말은 이긴다는 말이 아니고, 스스로의 목적하는 바를 이룬다는 뜻이다. 하늘의 길이 스며들어 인간의 길이 되므로, 인간의 길도 마찬가지의 이법으로 하늘의 도를 따르게 되고, ‘싸우지 않음의 길은 하늘로부터 명령받은 바에 따라 생명과 평화의 길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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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하지 아니하면서도 잘 응하고(不言而善應), 부르지 아니하는데도 저절로 오고(不召而自來), 천천히 하면서도 잘 꾀한다(然而善謀).” 하늘의 도는 언표된 개념과 지식체계를 통해 스스로의 뜻을 전달하거나 반응하지 않는다. 언어적 체계로 형상화된 인간의 지식체계는 시비와 선악과 호오와 피차의 분별의식을 토대로 이루어진 것으로서 유용하지만, 그것이 고착된 언어의 에 갇힐 때는 오히려 그 안에 내재된 독소를 내뿜게 된다. 그래서 불언지교不言之敎’, ‘희언希言’, ‘대음희성大音希聲이 노자의 언어쓰기가 되고, 자연의 도가 된다.

 

한겨울의 얼어붙은 대지는 누가 요청하지 않아도 봄이 되면 얼음 녹듯 풀린다. 여름의 찌는 듯한 더위도 가을의 문턱에 들어서자 저절로 사라지고, 누가 부르지 않는데도 한 줄기 청량한 소슬바람으로 돌아와 입가를 스친다. 햇살 비추인 가을 단풍잎들의 찬란한 자태는 누가 말하지 않아도, 겨울의 초입에 들어서자 찬바람에 잎들을 남김없이 떨군 채, 바람 찬 겨울의 뒤안길에서 앙상한 나뭇가지만 쓸쓸히 떨고 있게 된다.

 

하늘의 길은 무엇인가를 하기 위해서 서두름이 없다. 그 길은 잘 짜여진 프로그램처럼 한치의 오차도 없이 실행된다. 모두가 저절로 그러하나, 잘 도모되고, 잘 순환되고, 잘 돌아간다.

 

온우주의 길은 너르디 너르다(天網恢恢). 물질()과 생명()과 마음()과 혼()과 영()을 다 포괄하므로, 너르다. 시간과 공간을 다 포괄하니, 너르다. 그것을 일러 무변광대無邊廣大하다한다. ‘지대至大하다고 한다. 지극히 크니 밖이 없게 된다(至大無外).

 

화엄경의 인드라망의 세계가 이와 같을 것이다. 인드라망이란 화엄의 세계 중의 하나인 제석천의 왕의 문 앞에 걸려있는 구슬로 된 망이다(珠網). 이 인드라망은 겹겹이 쌓여 무궁무진하게 보석구슬들이 서로가 서로를 이리 비추고 저리 비추며, 얼키고 설키어 있다. 피차彼此가 서로서로 겹겹이 쌓여 이쪽 등불이 저리 비취고 저쪽 등불이 이리 비춰 서로가 서로에게 갈마들어간다. 이토록 서로 갈마들고(相徹)’, ‘서로 비추며(交映)’, ‘겹겹이 쌓여 다함이 없음(重重無盡)’인드라 문이라고 한다.

 

마음은 광대무변廣大無邊한 시방세계보다 크고, 작기로는 원자보다 더 작다. 그러나 이지러짐이 없다. 개미 속에 들어가도 작지 않고, 코끼리 속에 들어가도 크지도 않다. 의식의 세계의 드넓음을 비유한 것이 인드라망이다. 이와 비슷한 말이 중용中庸에 있다.

 

군자가 큰 것을 말할진댄(故君子語大),

천하에 능히 실을 수 없고(天下莫能載焉),

작은 것을 말할진댄(言小),

천하가 능히 깨트릴 수 없다(天下莫能破言).”

 

장자는

 

천하에 가을 털끝보다 더 큰 것은 없고(天下莫大於秋毫之末),

태산도 오히려 작다(而泰山爲小).”

 

라고 했다. 하늘의 그물은 너르디 너르다. 보기에는 성글성글한 것 같다. 성긴 듯해서 뭔가 예외가 있을 것도 같다. 어부가 그물을 치나 그물코가 듬성지면 물고기가 그 사이로 빠져나간다. 하늘의 법도 그와 같아서 그물코가 듬성듬성 되어 있으면 그 사이로 놓치는 것들이 많을 듯한데, 그렇지 않다고 노자는 말한다.

하늘의 길은 성긴 듯하지만 결코 놓치지 않는다(疏而不失). 성긴다, 듬성진다는 뜻은 다름아닌 무위無爲의 길이다. 결코 놓치지 않는다는 말은 무불위無不爲하다는 말의 다른 표현이 된다. 그러므로 소이부실疏而不失하늘의 도는 무위하나 무불위한다(無爲而無不爲)”는 말의 다른 표현으로 읽는다. 하늘의 길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은 없게 된다.

 

물고기가 물을 떠나면 살 방도가 없다.(魚不可脫於淵. 36) 물에서 벗어나게 되면 죽음이 있을 뿐이다(不道早已. 30). 사람도 예외가 아니다. 하늘의 도에서 벗어나게 되면 일찍 사라지게 된다. 마치 지구의 중력을 받지 않고 살 인간이나 생명체가 있을 수 없는 것처럼 말이다.

글 사진/민웅기(<태극권과 노자>저자,송계선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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