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언의 기다림으로 가운데를 지킨다 무위태극선 교실

민웅기의 무위태극선 교실4/달리는 말의 궁둥이를 내리쳐라/단편 單鞭

       

음양어의 마지막 자세인 천녀산화에서 양손이 벌어져 나와, 양쪽 겨드랑이 좌우에 벌려 있다. 오른손은 다섯 손가락이 합하여 종 모양을 하고 있고, 왼손은 세운 손의 날이 밖을 향해 똑바로 서 있는 품새가 흡사 채찍을 들고 말 궁둥이를 내려치는 듯하다. 단편單鞭이라는 이름은 채찍을 들고 말 궁둥이를 내려치는 형세를 뜻한다. 양다리는 왼쪽으로 치우친 마보馬步자세로 떡 버티고 있는데 그 기세가 태산 같다.

눈은 전방을 주시하는 듯하나 초점이 흐리고, 부드러운 듯 엄격한 표정은 누구라도 감히 범접할 수 없는 기상이다. 호방하여 고요함 속에 움직임의 기미를 감추고 있다. 단전이 묵직하게 내려앉아 중을 지키니, 긴장 속 휴식 같다. 무언의 기다림, 그것 같다.

  단편單鞭은 한 식을 마무리하고 다음 식을 준비하면서 취하는 의 형세이다. 태극선의 매 초식은 일식 일식마다 유형의 형상으로 드러나므로, 매 초식마다 그 시작과 마무리가 있는 법이다. 단편은 이전 초식의 마무리이자 다음 초식의 시작을 알린다. 그러므로 단편은 다음 식으로의 전환의 초식이다. 매 식마다 마치 대나무가 매듭을 맺고 자라는 것처럼 매듭을 맺고 나가니, 단편은 바로 매듭을 짓는 것과 같다. 그러나 조금이라도 식과 식 사이에 끊김이 있으면 안 되니, 매듭이란 바로 이어지는 식의 시작이다. 장삼풍 도인의 구결을 음미해 보자.

 

한 번 거동하면 전신을 가볍고 영활하게 하고

더욱이 반드시 꿰미로 꿰듯 이어져야 한다

 

一擧動周身俱要輕靈 일거동주신구요경령

尤須貫串 우수관천 (장삼풍 태극권론)

 

몸의 어느 한 구석에라도 힘이 들어가서는 가벼울 수 없고 영활할 수 없다. 온몸이 다 한 꿰미로 꿰듯 이어져야 하는 바, 안의 오장육부와 관절 마디마디, 그리고 뼈 속과 세포의 구석구석까지 낱낱이 연결되어야 한다. 관천이란 도미노패가 연거푸 쓰러지듯 몸과 식이 면면히 이어지는 것을 말한다.

그러므로 단편單鞭의 관건은 중에 있다. 중을 지키면서 이전의 식을 완결하고 중을 지키면서 다음 식을 준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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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지 사이가 마치 풀무와 피리 같구나.

텅 비어 있어 다함이 없고, 움직이면 움직일수록 더욱 나온다.

말은 많을수록 더욱 궁색해지니 중을 지킴만 못하네.

 

天地之間, 其猶橐籥乎! 천지지간 기유탁약호

虛而不屈, 動而愈出. 허이불굴 동이유출

多言數窮, 不如守中. 다언삭궁 불여수중 (5)

   

노자는 비어있음의 감응을 천지 사이의 허공을 비유해 느껴보라고 하는 것 같다. 하늘과 땅이 우리의 위와 아래에 나누어져 있음은 그 사이에 빈 허공이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허공이(天地之間) 마치 풀무질 할 때 쓰는 풀무의 속을 닮아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허공이 피리 속의 빈 공간을 닮아 있다는 것이다.(其猶橐籥乎) 속이 텅 빈 그곳에서 그칠 줄 모르고(虛而不屈), 움직일수록 더욱 많이 나옴(動而愈出)을 천지간에 있는 허공의 무한한 창조성을 빗대서 말했다. 꽉 차 있으면 움직일 수도 나올 수도 없을 것이다.

 

빈 허공으로 인해 하늘과 땅의 상호작용이 일어난다. 하늘이 땅의 법칙에 끼어들어 땅이 되고, 땅이 감응하여 하늘을 닮은 만물들을 생성하고 양육한다. 하늘은 덮고() 땅은 실어() 상호창조한다. 우주적 창조와 진화의 역사가 그 비어있음으로 인해 일어남이다. 만약 당신이 부는 피리의 속이 꽉 차 있다면 어떤 소리가 나올 것인가.

 

말이 많다는 것은(多言) 생각이 많다는 것이고 분별이 많다는 것이고 의 상이 많다는 뜻이다. 나를 내세우면 더욱 궁해진다(數窮). 나를 주장하면 자주 부딪힌다. 이것이 노자의 말씀의 요체이다. 태극선의 이치에 따라 풀면, 말이 많다는 것(多言)행공할 때 손과 발로 표현되는 몸동작이 화려함을 뜻한다. 태극권의 뜻이 신에 있지 않고, 외형의 몸동작에 치중함을 말한다. 삼풍도인의 경구를 되새겨 보자.

 

무릇 이 모두는 뜻이지, 외면에 있지 않다.”

 

凡此皆是意 不在外面 범차개시의 부재외면 (장삼풍 태극권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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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극구결에 뜻으로 기를 운행하고, 기로 몸을 운용한다.(以意行氣 以氣運身)”고 한 것이 바로 위의 말을 풀이한 것이다. 그러므로 노자의 중을 지킴만 같지 못하다.(不如守中)”는 말은 뜻으로 중을 지키라(守中)”는 말과 같다. 의념이 배꼽아래 단전을 지킴을 말한다. 몸을 말할 때는 미려가 정중正中에 옴을 말하거니와, 기를 말할 때는 기침단전氣沉丹田을 의미한다.

 

단편單鞭의 고요함은 뜻이 중을 지킴(守中)’에서 나온다. 활발한 가운데 고요함(動中靜)이고 고요함 가운데 뜻을 살핌이다.(靜中動)

 

우리네 인생은 할 말이 참 많다. 억울한 일도 많고, 누굴 나무랄 일도 많다. 나의 이익을 주장할 일도 많고, 자랑할 일도 참 많다. 그런데 말은 말을 부른다. 내가 말이 많으니 상대도 말이 많고, 많은 말을 하고 나면 허탈한 마음이 드는 때도 많다. 말이란 대개 말의 상에 빠져 진심 없는 껍데기만 지시하거나, 더 깊이 들어가 보면 무의식 속에서 아견我見, 아애我愛, 아만我慢, 아치我癡를 그 속에 담아 포장한 것에 불과하기 십상이다. 말은 많으면 그만큼 허점도 많이 드러나게 되니 말은 다만 뜻을 얻기 위해 할 뿐, ‘중을 지킴(守中)’만 못하다.

글 사진/민웅기(<태극권과 노자>저자,송계선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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