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중국 쓰촨성 청두의 한 체육관에서는 태극권과 격투기의 시합이 있었다. 이종격투기 선수 출신인 쉬샤오둥이 인터넷에서 중국 전통무술인 태극권을 비하하면서 태극권 수련자와 설전이 벌어졌고 결국 실제 대결까지 이어진 것이다. 결과는 태극권의 참패였다. 20초 만에 케이오(KO)승을 거둔 쉬샤오둥은 “중국 전통 무술은 시대에 뒤떨어졌고 실전 가치가 없는 사기”라며 언제든지 도전을 받겠노라고 공개적으로 무술인들을 자극했다. 이에 여러 문파의 고수들이 도전장을 던졌고, 한 기업인은 중국 무림의 자존심을 회복시켜 줄 호걸에게 1000만 위안(한화 약 16억원)을 내놓겠다고 했다.

 고전적 수련법과 현대적 훈련체계 간의 객관적 우열을 가리기 위해서는 개인 기량의 차이, 규칙의 문제 등 통제해야 할 변수들이 남아 있지만, 전통 무술이 현대 격투기에 비해 실전적 효용이 떨어진다는 것은 거부할 수 없는 현실이다. 동양적 지혜의 집약체인 전통 무술이 (그에 비하자면) 건조하기 짝이 없는 기계적 트레이닝 앞에 무릎을 꿇은 셈인데, 중국인들에게는 ‘동아시아의 병자’로 취급당했던 과거의 쓰린 기억을 떠오르게 만들었는지 모른다. 인공지능 알파고가 인간만이 할 수 있다고 자부했던 영역을 침범했을 때 느꼈던 당혹감, 불쾌감이 되살아난다.

 

512 (1).jpg

 

 꽤 오랜 기간 무도는 실전적 효용과 정신 수양의 가치가 혼재된 상태로 전승되어 왔다. 그러나 점차 외부적 변화 혹은 내부적 선택에 의해 격투술로서의 가치보다는 수행적 가치를 중시하게 되었으며 이제 그 흐름을 뒤집기란 쉽지 않아 보인다. 이종격투기의 등장으로 ‘고전적 무도가 존재하는 이유는 무엇인가’라는 근원적인 물음을 피할 수 없게 되었다. 최초에 수학 연산을 목적으로 개발된 컴퓨터가 장차 다가올 미래에 온라인 게임을 위해 봉사하게 될 줄은 몰랐을 것이다. 더군다나 자신의 사고 엔진이 모바일로 진화하여 인간 삶의 양식과 산업의 흐름마저 바꾸리라고는 차마 상상조차 하지 못했을 것이다. 이와 비슷한 운명으로, 개체를 보존하고 강함을 추구하려는 동물적 본능으로부터 기원된 무도수련은 이제 새로운 임무를 부여받기 위해 기다리고 있다. 신체에 각인되어 있는 감정 작동의 원리를 정신수양의 방법론으로 전용한다고나 할까. 골프, 테니스, 야구 등의 스포츠에서 신체 각 부위를 올바르게 정렬하고 적절한 협업을 통해 제대로 된 힘을 발휘하였을 때 찾아오는 쾌감이 있다. 격투술에서 한 차례 추상화된 무예의 몸짓은 이제 문화적 산물로서 독립된 생명력을 가지고 전승된다. 선대 수련자들의 역사적 경험과 그들이 공유했던 정신세계가 무예의 동작 속에 고스란히 남게 되고 그 동작을 수행함으로써 그 거대한 정신의 맥락에 접속하는 것이다.

 이제 남는 물음은 한 가지다. 왜 여전히 격투행위의 형식을 유지하는가? 쓰지도 않을 거면서. 정신수양을 추구한다지만 막상 동작이 조금이라도 흐트러지면 “그렇게 하면 죽어! 그건 통하지 않는 수야”라는 말을 듣게 된다. 어찌 보면 역설이자 모순처럼 느껴질 수 있는데, 바로 그 간극이야말로 무도가 존재하는 자리이다. 실전적 긴장감을 상실하는 순간 그 행위로 동반되는 정신의 상태 또한 희미해지게 되므로 살심과는 또다른 어떤 치밀함이 서려 있어야 한다.

 

육장근의 무예 동작

 

 저 아득한 곳에서 일렁이기 시작한 파도가 밀려와 해변가에 서 있는 나의 발등을 적시듯, 우주가 팽창하고자 하는 의지가 생명체의 본능으로 구체화되고 그것이 인간에 이르러 정신적 가치로 전화되기까지 얼마나 먼 길을 걸어왔을까. 익숙한 목표를 상실한 채 허공에 내지르는 무인의 주먹은 어쩌면 그 본원적 힘에 합일하고자 하는 의지는 아닐까. 무도의 길은 지금부터 시작이다. 

 

글,사진,동영상/ 육장근(전통무예가)